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김창열 칼럼] 거슬리는 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김창열 칼럼] 거슬리는 말

입력
2001.04.25 00:00
0 0

신문을 읽다 보면 마음에 거슬리는 말들을 닥뜨릴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지난 월초 신문마다 "원조교제에 1000만원 벌금"이란 표제의 기사가 실렸다. 10만원을 주고 17세 소녀와 성관계를 가진 25세 청년이 그 100배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기사에 나타난 사안은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매매춘(賣買春)이다. 사건의 처벌 근거인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5조가 규정한 죄명도 "청소년의 성을 사는 행위"로 되어 있다. 그런데 신문들은 왜 이를 원조교제라고 말을 돌릴까.

잘라 말하면, 원조교제는 근래 일본에서 들어 온 말이다. 교육 황폐화 현상으로 나타난 여학생 매춘을, 일본 신문들이 완곡하게 바꿔부른 것이 그 발단이다.

그런 말이 우리 신문에까지 스며 들었으니, 읽어서 마음에 거슬릴 수 밖에없으나, 그 뜻이 정확치 못한 것이 더 문제다. 마땅히 '청소년 매춘'으로 바로 잡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 것은 사소하다면 사소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 보다 더 맹랑한 것은 일본의 어문(語文)정책이 돌고 돌아 우리 말과 글을 교란하는 경우다.

그 실례로, 성심 외국어 대학의 이우석(李于錫) 교수는 우리나라 대표적 공기업의 다음 광고를 든다.(月刊 "한글 + 漢字문화" 2000년9월호).

"얼음 바다 최선단(最先端)에는 쇄빙선/

통신한국 최선단에는 ○○통신"

여기서 문제는 '最先端'인데, 이 말은 일본의 어문정책이 만들어 낸 신조어(新造語) - 그런 뜻에서는 순수한 일본 말이다.

좀 길지만, 설명하면 이렇다.

일본은 46년이래 당용한자(當用漢字) 또는 상용(常用)한자라고 해서, 한자 사용을 1945자로 제한하고 있으며, 여기 들지 못한 한자는 음(音)이 같고 뜻이 유사한 한자(代用漢字)로 바꾸어 쓴다.

이렇게 해서 생긴 신조어 중의 하나가 '最先端'인데, 상용한자에서 빠진 '尖'을 음이 같은 '先'으로 대용한 것이다.

그런 말을, 그대로 옮겨다 광고를 하다 보니, '최첨단'(맨 앞장)에 있어야 할 ○○통신의 자리가 '최선단'(맨 앞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같은 예는 ○○통신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굴지의 자동차 메이커는 자사(自社) 제품인 굴삭기(掘削機)를 열심히 선전하고 있다. 우리말로 하면 굴착기(掘鑿機)라야 옳다.

어떤 회사는 엔진 세정제(洗淨劑)를 자랑한다. 세척제(洗滌劑)의 잘못이다.

심지어 올 봄 대학 신입생 모집광고에는 선고(先考)라는 말까지 나왔다.

전형(銓衡)이란 두 글자가 모두 상용한자에서 빠지자, 선발고사란 뜻으로 새로 만든 일본말이다.

이 밖에도, 요즘 신문을 읽다가 마음에 거슬린 말이 또 있다.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쓰인 한ㆍ일합방(韓日合邦)이란 말이다.

다 아는대로 한ㆍ일 역사 분쟁의 한 초점은 일본의 한국통치,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이른 바 일ㆍ한병합(日韓倂合)조약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

이에 대한 우리 측 견해는 병합조약은 강 요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며, 따라서 일본의 한국통치는 원천적으로 불법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합방'이란 말은 두 나라가 대등함을 전제로 한다. 우리 측 주장의 근본을 허물어뜨리는 말이다. 이 점, 조약체결 당시의 일본 외무차관은 다음과 같은 뜻의 말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어떤 사람은 한렝?두 나라가 대등한 입장에서 합치는 것으로 알고 합방 또는 합병이란 말을 써 왔으나 한국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을 과격하지 않은 말로 표현하기 위하여 그 때까지 별로 쓰지 않던 병합이란 말을 선택했다."

이 말에서 보듯, '합방'이란 말은 당시 일본 사람들의 속내에 비추어서나, 우리 처지에 비추어서나 가당치 않은 말이다.

더구나 그 말이 매국 단체 일진회(一進會)의 '일한합방' 청원에서 비롯되었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

적실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병합도 아닌 병탄(倂呑)이다. 일본 역사 교과서를 나무라는 것은 우스개나 다름 없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