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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기행] (4)악학궤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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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기행] (4)악학궤범

입력
2001.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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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나라 조선은 음악을 중시했다. 바른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교화해서 좋은 세상을 만든다고 여겼고, 음악이 어지러우면 임금의 통치가 그릇된 데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예와 악을 앞세우고 형과 벌을 뒤로 하여 다스리는 이른바 '예악사상'에 따라 음악을 관장하는 국립기관을 여럿 두어 연주자를 길러내고 음악 책을 펴내며 악기를 만들고 제사나 잔치, 조회 등 왕실과 나라의 여러 행사에 음악을 시행했다.

성종 24년(1493년) 예조판서 겸 장악원 제조 성현 등이 편찬한 '악학궤범'은 조선 전기의 음악을 집대성한 책이다.

앞서 세종 시대에 이뤄진 대대적인 음악 정비의 성과를 바탕으로 당시 음악의 모든 것을 기술하고 있다.

9권 3책의 내용은 음악이론, 악기 편성과 연주 절차, 악기 제작과 연주법, 음악에 따르는 춤의 내용, 거기에 쓰이는 온갖 의상과 소품까지 글과 그림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그대로 따라 하면 될 만큼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이다.

이를테면 악기편에서는 악기 형태, 부분별 치수와 색깔, 재료, 줄 고르는 법, 연주법까지 그림과 더불어 빠짐없이 적고 있다.

춤을 설명할 때는 연주자와 춤추는 이 몇 명이 어느 방향으로 어디에 자리잡는지, 춤의 절차는 어떠한지, 시시콜콜 기술하고 있다.

61종의 악기, 20여 곡의 음악, 30여 종의 춤, 70여 종의 의상과 소품이 가지런히 망라돼 있다.

'궤범'이라는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음악 시행의 기준이자 실용적 지침서가 됐다.

임진왜란으로 많은 음악인이 죽거나 일본으로 잡혀가고 여러 악기와 문헌이 타버리자 광해군은 '악학궤범'을 다시 찍어 음악을 복원했다.

이후 효종과 영조도 이를 재간행했다. '악학궤범'이 없었더라면, 조선의 음악이 제대로 전승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러울 만큼 모델이자 길잡이로 중요하다.

성종은 당시 음악기관인 장악원에 악학궤범 편찬을 명했다. 장악원이 갖고 있던 의궤와 악보가 오래 되어 헐었고 남은 것들도 간략하거나 틀리니 보정하라는 어명이었다.

편찬을 주도한 성현은 문관이면서도 음악에 밝았다. 그가 정치적 마찰로 인해 외직으로 밀려나자 장악원 제조 유자광이 임금에게 진정했다.

"경상도 관찰사는 딴 사람도 할 수 있으나 장악원 제조는 (음악을 잘 아는) 성현이 아니면 안된다"는 청에 성종은 바로 다음날 성현을 예조판서로 고쳐 임명, 예조 산하인 장악원을 계속 맡겼다.

오늘날 일반 독자가 '악학궤범'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국역본이 있다 하나 어려운 음악이론을 밝히고 있는 제 1권부터 벽에 부닥친다.

그러나 당대의 여러 악기를 설명한 부분이나 제사나 잔치, 조회 등 왕실과 나라의 여러 행사에 쓰인 춤을 다룬 대목은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당시 음악이 시행되던 광경을 눈 앞에 보는 듯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국악 전공자를 비롯한 연구자들에는 물론 필독서이다. 우리 음악의 역사가 매우 깊고 성대했음에도 문헌이나 이론적 정비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악학궤범'은 더욱 귀하다.

음악사 뿐 아니라 국어국문학, 전통무용학, 복식사, 의물(공연 소품) 연구에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사료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쓰여진 이 책의 정밀한 기술 방식은 오늘날 민족 음악학 체계에 비춰봐도 나무랄 데가 없다.

'악학궤범'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음악학자 이혜구 박사는 "추상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구체적으로 상술한 '악학궤범'의 기술 방식은 우리나라 옛 문헌으로는 보기 드문 것이자 근대과학의 방법론에 비춰 봐도 놀라운 것"이라고 평가한다.

15세기 말 이만한 음악 책을 펴낸 민족도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 먼저 나온 여러 음악 책이 있지만, 내용 면에서 '악학궤범'의 세밀함과 풍부함에 못미친다.

'악학궤범'은 조선 최고의 음악 기준서일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전통음악과 춤을 연구하고 재현할 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완성도 높은 책으로 자리잡고 있다.

'악학궤범'은 목판으로 인쇄됐다. 나무판에 글씨를 파고 그림을 새기고, 악기나 소품, 의상 등을 일일이 점검하고 칫수를 재어 자료를 정리하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력이 들어갔을까.

이로 미루어 '악학궤범' 편찬이 당대의 문화 역량을 쏟아부은 국가적 대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역 '악학궤범'은 북한에서 1956년 렴정권의 번역으로 처음 출간됐고 남쪽에서는 이혜구 박사의 번역으로 1979년 나왔다.

민족문화추진회 고전국역총서로 발행된 이혜구 박사의 '국역 악학궤범'은 나온 지 20년이 넘었고 새로 찍지 않아 시중에서 구하기 어렵다.

이를 보강한 '신역 악학궤범'이 5월에 나온다. 그동안 이룩된 학문적 성과를 충분한 각주로 반영한 새 책이다. '신역 악학궤범'은 오늘날의 장악원이라 할 수 있는 국립국악원이 개원 50주년 기념으로 발행한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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