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씨의 근간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창작과비평사 발행)을 읽다가 '소만(小滿)'이라는 시를 만났다.소만은 입하(立夏)와 망종(芒種) 사이의 절기로 5월21일께부터 약 보름간이다. 소만은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의미를 지녔다.
모내기가 시작되고 보리 베기에 바쁜 철이다. 입하 다음에 오는 절기이므로 여름의 문턱을 훨씬 지난 듯 싶지만, 24절기는 중국의 황하와 장강 사이의 지역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한국에서는 차라리 봄의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소만 바람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거나 "소만 바람에 소대가리 터진다"는 이북 속담이 있는 걸 보면, 북한 지역의 소만은 쌀쌀한 추위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시인은 초록의 질감을 통해서 소만을 느낀다.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는 말로 노래를 시작한다.
초록은 풀빛이다. 소만 때의 풀빛은 시인이 보기에 "조금 빈 것도 같"고 "조금 넘을 것도 같"다. 그러니, 그 때의 초록은 득중(得中)의 빛깔이다.
그런데 초록에는 풀의 이미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컨대 동요 '초록빛 바다'가 상투화했듯 물의 이미지도 있다.
초록은 한 시기의 풀의 빛깔이기도 하면서 어떤 순간의 물의 빛깔이기도 하다. 시인은 물의 초록을 물비늘에서 알아챈다. 물비늘이란 잔물결이 햇살에 비치는 모양이다.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화자는 햇살이 쏟아지는 물가에 있다. 아니, 그는 초록의 식물에서 물결을 본다.
이 구절에서, 소만의 득중은 풀이나 물이 뿜는 초록의 득중이기도 하고, 화자 마음의 득중이기도 하다.
소만은 푸른 빛과 누른 빛 사이에 있고, 무성(茂盛)과 헐벗음 사이에 있다. 그 때 시인의 마음에 드리워지는 그늘은 넉넉하되 너무 넘치지는 않는 그늘이고, 다사롭고 서늘한 그늘이다.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옅음의 기억으로 그것은 다사롭고, 종국에는 닥치고야 말 짙음의 예감으로 그것은 서늘하다. 그 그늘은 눈이 시린 균형, 위태롭고 찬란한 균형 위에 있다.
소만이 지나면,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무번울창(蕪繁鬱蒼)에서 어떤 부끄러움의 기미를 읽는다. 또렷한 것, 짙은 것, 거침없는 것은 날것이고, 날것은 부끄럽다.
그래서 시인의 귀는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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