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보 같은 늙은이는 왜 이토록 벌레처럼 쩔쩔 매고 있을까? 살짝 밀기만 하면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죽고 말텐데..' 마침내 청년 라프카디오는 노인 아메데를 질주하는 기차간에서 내다 밀고 만다. 노인은 "지금 교황은 가짜"라며 사기를 일삼는 인간이다.예술의 전당이 앙드레 지드의 50주기를 기념, '교황청의 지하도'를 국내 초연한다. 느닷없는 살인 사건이 축이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사람을 죽이듯. 19세기말 파리 사교계와 로마 종교계를 배경으로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또 하나의 살인이 점입가경이다. 수사 중 사건의 범인으로 내몰린 라프카디오의 후견인이 저지른 살인이다. 경찰의 수사망이 죄어 오자, 그는 고발자를 찔러 죽이고 만 것이다. 여기서 모든 인간은 부조리하다.
한술 더 떠, 주인공 라프카디오는 태생적으로 완전히 내동댕이 쳐졌다. 그는 유럽 최상류층 남자들만 상대하는 고급 창녀의 아들이다.
그러나 돈 한푼 남기지 않고 갑자기 죽은 어머니에, 생부 마저 나몰라라 하던 사생아다. 어려서부터 향락의 세상에 너무 익숙해진 문제적 개인일 뿐이었다.
무대 공간부터가 삐딱한, 불온의 무대다. 권위와 질서의 상징, 로마 교황청은 조롱 받듯 비스듬히 매달려 있다. 그 무대에 온통 도배돼 있는 것은 신문지. 당대의 진실 또는 풍문을 장악한, 담론의 진원지로서다.
이 연극은 자수함으로써 세계와 화해하는, '죄와 벌' 식의 결말을 끝까지 허용하지 않는다.
라프카디오는 모든 사실을 다 알게 된 애인 쥬느비에브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사랑의 밤을 지새며 객석에 커다란 물음표를 남겨준다. 자수해 떳떳한 인간이 될 것인가, 영원한 어둠속에 숨어 지낼 것인가?
주제의 무거움을 감각으로 풀어 헤친다. 고급 사교계에 만연한 사기 행각은 소극(farce)적으로, 두 가지 살인은 추리극적으로 풀어 진다.
논리적 연결점 없이, 무대 상황의 끝 장면이 바로 다음 장면의 단서로 풀어 가는 장치가 신선하다. 인간의 다면성과 부조리성을 표출하는 극적 전술이다.
컴퓨터 음악가 황성호씨의 전자 음악에,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씨의 추상적 무대 설치가 21세기형 부조리 무대에 큰 몫을 한다.
문호근(예술의전당 공연예술감독) 연출, 최명수 박용수 이영숙 등 출연. 19~29일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평일 오후 7시 30분, 금ㆍ토 오후 4시 7시 30분, 일 오후 4시. 25일 쉼.
사기꾼들에게, 신문은 세상을 기만하는데 이용되는 도구일 뿐이다.
장병욱기자
aje@hk.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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