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11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축산과 재학생 김상진(26)이 수원의 이 대학 교정에서 유신 철폐를 외치며 할복했다.그는 혼수 상태에서 서울 원남동의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지던 도중에 사망했다. 김상진은 1949년 11월25일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에 서울대에 입학했다.
그는 3학년 1학기까지를 다니고 세 해 동안의 군 복무를 마친 뒤 1974년 2학기에 복학한 졸업반 학생이었다.
1975년 봄은 박정희 유신 체제의 야만성이 끝간데를 모르던 시기다. 그 해 3월에는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에서 비판적 기자들이 무더기로 해직됐고, 4월9일에는 고문을 통한 조작의 혐의가 짙은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여덟 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그 시기의 한국을 지배하던 최고의 법규범은 헌법이 아니라, 이른바 대통령 긴급조치였다. 이 긴급조치는 긴급조치의 정당성에 대한 토론 자체를 긴급조치로 금하고 있는 재귀적(再歸的)이고 자기폐쇄적인 희한한 규범이었다.
그 해 4월초 학원 자율화와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서울대 농대생들의 가두 시위 도중에 농대 학생회장 황연수와 축산과 4년생 김명섭이 연행됐고, 이들의 석방과 민주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집회가 4월11일 농대 교정에서 열렸다.
이 집회의 세번째 연사로 나온 김상진은 '양심선언문'을 읽은 뒤 품안에서 과도를 꺼내 할복했다. 김상진의 죽음은 그 해 5월22일 그의 추모 집회인 세칭 '오둘둘 사건'으로 이어졌다.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서 열린 이 추모식의 사회를 본 김도연(국문과 4년ㆍ1993년 작고), 조시를 읽은 김정환(영문과 4년ㆍ현 한국문학학교 교장) 등 60여명의 학생이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끝이 안 보이던, 칠흑 같은 어둠의 시기였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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