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나 지방이나 지하철을 타다 보면 역 이름에 대학 이름이 참 많다. 외국인 여행자로서는 역이 속하는 동네가 아닌 한 이름 외우기가 참 힘들다. 숭실대, 성신여대, 숙명여대... 외국인에게는 발음과 구별이 어려운 것이다.내가 지금 사는 집 근처 역 이름은 '동대입구'다. 동국대 근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 바로 위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장충단공원'이 있고, 역이 속하는 동네도 '장충동'이다. 그러면 이 역은 마땅히 '장충단'이나 '장충동' 되야 하지 않을까.
서울 지하철 4호선의 성신여대입구, 한성대 입구, 숙대입구 각 역은 각각 괄호 안에 작게 돈암, 삼선교, 갈월이라고 지역 이름을 병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닐까. 물론 이대 앞처럼 대학 이름이 지명과 길 정도로 정착되고, 외국 가이드북에도 그대로 소개되어 있는 정도면 몰라도 역명에 알지도 못하는 이름을 붙이고 안내를 한다는 것은 지하철의 공공성을 무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이 문제는 대학의 요구 때문에 지하철 운영당국이 시민의 교통 편익과 지역의 정체성을 침해하고 있는 격이다.
이런 현상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 서울 4호선 총신대입구역의 사례다. 이 역은 계획 당시 이름이 이수(梨水)였다.
비록 이수동이라는 행정동은 없지만 지명사전을 뒤지면 도시화 이전의 마을 이름이 '배나무골'이었다고 나와 있다.
배나무골에서 현 반포동으로 건너가는 옛다리 이름이 '배물다리', 즉 한자어로 이수교인 것이다. 뜻도 소리도 참 아름다운 땅이름이다.
그러나 막상 4호선이 개통했을 때, 이 역 이름은 '총신대입구'가 되었고, '이수'를 괄호 속으로 내몰았다.
그 후 15년이 지나서 이 역에서 교차하는 7호선이 개통됐다. 그런데 7호선의 남성역이 총신대와 더 가깝기에, 남성역 뒤에 '총신대 입구'로 괄호 표기하는 대신 종전의 '총신대 입구'역은 '이수'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때부터 총신대 당국과 학생의 민원이 쏟아졌다고 한다. 지난 연말 일본에 갔다가 올 1월말 귀국해 서울에 돌아왔더니 이수역 이름은 다시 괄호 속으로 들어간 대신 '총신대 입구'란 역 이름이 부활해 있었다.
600년 역사를 가진 서울에 그렇게 땅 이름이 모자라는 것인가. 아니다.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만 보아도 예로부터 전해져 온 옛 땅이름이 숱하게 쏟아져 나온다.
순 한국어 지명들이 통합, 변경된 때가 일제시대였기에 일본인인 나의 설득력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의 역사를, 각 동네의 정체성을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시 당국이 지명에 무관심하면 더욱 문제가 아닐까. 최근 개통된 6,7호선에는 광흥창(조선시대의 국영 창고), 버티고개(광희문에서 한강나루로 나가는 고개), 장승백이(정조 대왕 행차길의 길잡이) 등 고장의 향토사를 뒤지면서 붙인 역명이 많다.
옛 땅이름이 대학이름보다 더 낯설다는 이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도시 문화정책을 위해서 어느 쪽이 유익한지, 답은 쉽게 나오지 않을까.
도도로키 히로시ㆍ서울대 지리학과 박사과정ㆍ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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