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등불은 육주(六洲)에 찬란하고 자유의 종은 사방에 요란한데,우리들은 무슨 죄가 있어 홀로 이 지옥인고.이 책의 소개로 대한중흥 삼걸전, 아니 삼십걸전, 삼백걸전을 쓰게 되는 것이 나 무애생(無涯生)의 피 끓는 영원한 염원이다."
구한말과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ㆍ1880~1936)는 1907년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번역하며 서론에서 애끓는 심정을 털어놓았다.
을사조약과 한일신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군대마저 해산된 조국의 현실 앞에서, 단재는 세 영웅이 주도한 가슴 벅찬 이탈리아 통일 과정이 조선에서도 일어나기를 기대한 것이다.
'이태리 건국 삼걸전'(지식의 풍경 발행)은 청 말기 개혁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ㆍ1873~1929)가 1903년에 쓴 것을 단재가 국한문혼용으로 번역, 1907년 10월 25일 서울의 광학서포에서 발행된 책이다. 위암(韋庵)장지연(張志淵)이 교열을 보고 서문을 썼다. 현대어로는 류준범 장문석씨가 옮겼다.
책은 마찌니(1805~1872), 가리발디(1807~1882), 카부르(1810~1861) 등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을 이룬 세 영웅의 이야기이다.
또한 소국 난립기와 프랑스ㆍ오스트리아 점령기를 거쳐 마침내 1861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건설한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부흥운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먼저 이탈리아 통일의 '혼'으로 추앙받는 마찌니. 우리에게는 청년 이탈리아단을 창설한 인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줄기찬 독립운동 끝에 1849년 로마 공화국의 수반이 되었으나 1870년에는 시칠리아의 공화주의 폭동에 연루돼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이탈리아의 많은 좌파 지식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샤르데냐 왕국의 해군으로 복무하며 끝내 1860년 이탈리아 남부 원정에 나선 이탈리아 통일의 '검'가리발디 또한 통일의 주역이다.
그가 남부 원정에 성공한 뒤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스스럼없이 샤르데냐 왕국의 군주 에마누엘레 2세에게 헌납한 일은 영웅만이 할 수 있는 쾌거로 기록되고 있다.
샤르데냐 왕국의 수상을 지낸 카부르는 또 어떤가. 토리노 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샤르데냐 왕국에 일련의 자유주의적 개혁을 도입한 인물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이탈리아 사정을 파리강화회의에 알린 것도, 프랑스와 동맹을 이끌어낸 것도 바로 그였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 통일의 '두뇌'로 불린다.
책은 이들의 생애와 이탈리아 통일 과정을 장중한 문체와 숨가쁜 호흡으로 묘사하고 있다.
량치차오는 이들을 마치 '삼국지연의'의 영웅들로 여기는 듯하다. 카부르가 영지에서 농사지은 10여년은 제갈량이 남양에서 몸소 밭을 갈며 때를 기다린 일에 비유되고, 가리발디와 마찌니가 손을 맞잡는 장면은 유비가 조자룡을, 조조가 허저를 얻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량치차오는 중국에도 이 같은 영웅이 또 한번 출현하기를 고대했다.
이는 단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책을 번역한 뒤 곧바로 조선에서 '삼걸'을 찾는 작업에 들어갔다.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 민중을 애국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끈 조선의 영웅 세 명을 꼽아 '을지문덕'(1908) '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1908) '동국거걸 최도통전'(최영ㆍ1909)을 펴냈다.
그러나 이 같은 영웅주의적 역사관에도 불구하고 단재는 민중의 위대함을 망각하지 않았다.
그는 책 말미에 실린 결론에 이렇게 썼다. "이태리의 건국이 어찌 다만 삼걸의 공이겠는가. 마치니 당파 중에 무명의 마치니가 몇 백 몇 천 명인지 어찌 알겠는가.
전국이 갈팡질팡하여 아픈 줄도 모르고 가려운 줄도 몰랐다면 비록 삼걸이 있었어도 어찌 행할 수 있었겠는가."
김관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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