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종석의 글과 책] 박영근 근작시 9편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종석의 글과 책] 박영근 근작시 9편

입력
2001.03.27 00:00
0 0

박영근(43)씨가 계간 '내일을 여는 작가'봄호에 아홉 편의 시를 발표했다. 박노해씨나 백무산씨에 견주면 덜 알려진 이름이지만, 박영근씨는 80년대 이래 '취업 공고판 앞에서''대열''김미순전(傳)'등의 시집을 통해 노동자 계급의 희망과 좌절을 단단한 언어로 형상화해온 '노동자 시인'이다.'내일을 여는 작가'의 '이 계절의 시인' 난에 실린 아홉 편의 시들에도 노동자의 목소리가 실려 있다.

시적 화자들은 노동자이거나 노동자였거나 그 비슷한 사회경제적 처지에 놓인 이들로 짐작된다. 이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그리 우렁차지 않다.

임박한 혁명을 노래하던 80년대 노동시들의 그 비장하면서도 낙관적인 낭만주의가 이 시들에는 없다.

세속의 싸움에서 밀려난 개인들의 우울한 서정이 감돌 뿐이다. 그것은 박영근씨 개인의 마음의 결이기도 하고, 그가 자신에게 투입한 이 시대 노동자 계급의 마음 결이기도 할 것이다.

서정시는 근본적으로 시인 자신의 노래다. 거기서는 시인과 시적 화자가 온전히 겹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

소설가는 자기와 무관하거나 자기에게 적대적인 인물들을 창조해, 그들이 놀 자리만 마련해주고 자기는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서정시인은 그럴 수 없다. 남성 시인이 여성을 시적 화자로 삼을 때도, 노년의 시인이 어린이를 시적 화자로 삼을 때도, 시인과 시적 화자는 좀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이 서정시가 수필과 공유하고 있는 운명이다. 서정시는 운문으로 쓴 수필이고, 수필은 산문으로 쓴 서정시다.

정신 병동과 단칸방에서의 어떤 순간들을 고통스럽게 되돌아보는 '마흔을 넘긴 여자'('겨울비')든, '지나간 밤 여인숙 방에서 치던

/ 낯선 여자와의 그 서툴던 화투판을 생각'(이 구절은 언뜻 초기 신경림을 연상시킨다)하는 떠돌이('강화에 와서')든, '온통 쇼핑몰이 되어 흘러가는 길/ 인파와 소란 속/ 무스탕을 걸치고 웃고 있는 네거리 현대 백화점

/ 마네킹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무직자('고개를 숙인다')든, 이 화자들의 목소리는 결국 시인의 목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이 잦아들어 있는 것은, 사라져 버린 변혁의 전망과 더 고달파진 노동자들의 삶에 시인이 자신을 투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바로 그 잦아든 목소리로 일정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다. 박씨의 시들은 지금의 문학 지도에서 분명히 주변적이고, '단순하게 살게 해달라고 매일 매일 나에게 애걸했어요

/ 해동을 하는 나무처럼 목도 팔도 다리도 잘라버리고 싶었으니까요'('겨울비')라는 시적 화자의 외침처럼 깊은 심리적 상처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의 시들은, 모든 진정한 예술이 그렇듯, 스스로 주변으로 밀려남으로써, 스스로 상처가 됨으로써, 시대의 야만성과 궁핍성을 증언한다.

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