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과 함께 걸어서 서빙고 나루터까지 갔다. 작은 보트 하나로 두 세 명씩 강을 건네주고 돈벌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그러나 밀려드는 피난민들이 서로 먼저 타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화가 났는지 그 사람은 보트를 백사장에 올려놓고 노만 들고 가버렸다.
우리는 보트 주인이 눈치채지 않도록 살펴보고 있다가 냅다 달려들어 보트를 강물에 띄웠다. 노 대신 두 손을 강물에 집어넣고 열심히 물을 저었다.
보트는 물살에 밀려 반포쪽 기슭에 닿았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생전에 6ㆍ25 전쟁 체험을 말한 이 고백은 '인간 정주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란을 피해 달아나는 막다른 한계상황, 희망이 꺼지는 좌절의 순간, 모두가 똑같이 처한 동일한 시공에서 그가 취한 행동은 확실히 남다른 것이었다.
기민한 판단력과 순발력, 발군의 모험심과 생존력 등 그는 역시 타고난 '경쟁력의 화신'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그의 내면 세계는 어떠했을까. 이런 점에서 그가 장년 이후에 갖게 된 좌우명은 중요한 시사 포인트다.
밖으로 강하게 나타나는 그의 '동물적' 특성과 달리 그가 가장 지키려 했던 것은 '담담한 마음'이었다 한다.
이에 대해 정 전 회장은 언젠가 현대그룹 사보 인터뷰에서 "담담한 마음이란 선비들의 청빈낙도와는 다르다. 무슨 일을 할 때 착잡하지 않고, 말이나 생각이 정직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인생과 사업의 경륜에서 얻은 이런 좌우명이 그를 더욱 크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이제 그가 떠난 계동 현대 사옥 사무실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자필 좌우명이 남아 있다.
'담담한 마음을 가집시다. 담담한 마음은 당신을 굳세고 바르고 총명하게 만들 것입니다.' 미쳐 돌아가는 우리 사회야 말로 이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본다면 그것이 정 전 회장이 남긴 가장 값진 사회적 유산일 것이다.
/송태권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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