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행은 새벽 2시 반이 넘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카라코룸에 도착했다. 포장도 안 된 흙길을 10시간 가까이 덜컹거리며 달렸으니 온통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이 된 몸은 이미 곤죽이 되어 감각조차 무디어진 상태였다.그렇지만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서쪽으로 300㎞가 넘는 거리를 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란바토르에서 오후 5시가 다 돼서야 떠난 우리가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워낙 빡빡한 일정이었기에 오전에 울란바토르 시내를, 그리고 이른 오후에는 근처에 있는 톤육쿡비문을 보느라고 그랬으니, 어찌 다른 방도도 없었다.
밤 12시가 넘어 우리를 실은 차가 카라코룸 근처까지 오긴 했지만, 이제는 그 흙길마저 없어져 그냥 풀밭 위를 달려야만 했다.
낮에는 그렇게도 길을 잘 찾아다니면서 엄청난 시력을 과시하던 몽골인 운전수도 밤에는 전혀 맥을 추지 못했다. 초원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이 보여 달려가 보면 다른 곳이었다.
번번이 그렇게 허탕치며 초원을 헤매기를 거의 2시간. 마침내 우리가 묵을 숙소를 알리는 간판을 찾아냈다.
우구데이호텔!
아무 것도 없는 초원 한 가운데에 서있는 호텔 앞에 선 자동차의 헤드 라이트마저 꺼지자 우리 머리 위를 덮고 있던 밤하늘이 갑자기 수도 없이 많은 별들로 빛나기 시작했다.
정말로 '입추의 여지도 없다'는 말의 본래 뜻이 실감날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이었다. 몇 년전 천산산맥 기슭에 있던 카자흐족 천막에서 잤을 때 보았던 바로 그 하늘의 별들이었다.
칭기즈칸의 등장을 기록한 몽골인들의 서사시 몽골비사에 "별이 총총한 하늘이 곤두박질치고."라는 구절이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카라코룸(Qaraqorum)'. 이 말은 몽골어로 '검은 자갈밭'을 의미하며 오늘날 그들의 발음으로는 '하르호린'에 가깝게 들린다. 13세기 몽골제국의 시대에는 앞의 '하르'라는 말을 빼고 '호린'이라고만 부르기도 했으니, 중국 사람들은 그 음을 듣고 '허린(和林)'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칭기즈칸 시대에 제국의 중심은 케룰렌 상류였지만, 카라코룸으로 수도를 정한 것은 그의 둘째 아들이자 제2대 대칸이 된 우구데이의 치세(1229~41)였다.
아마 우리가 머물렀던 천막식 호텔에 '우구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도 바로 카라코룸과 그와의 뗄 수 없는 밀접한 인연 때문임이 분명했다.
1235년 늦봄, 대칸 우구데이는 오늘날 카라코룸 부근에 있는 '달란 다바스'('일흔 고개'라는 뜻)에서 거대한 집회를 열었다.
몽골어로는 '쿠릴타이'라고 불리는 이 회의에서 그는 이곳을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고 공사를 착수시켰다.
그가 북중국을 정복했을 때 데리고 온 기술자들이 대거 투입돼 공사가 시작된 지 불과 일년 만에 궁전이 완성됐다.
중국인들의 글에는 이 궁전의 이름이 '만안궁(萬安宮)'이라 돼 있지만, 당시 몽골인들이 그런 중국식 이름으로 불렀을 리는 만무하다.
페르시아측 자료에는 그들이 이를 '카르시(궁전)'라 불렀다고 명시돼있다. 나아가 우구데이는 왕자와 귀족들에게도 그 주변에 높은 건물을 지으라고 명령했고, 이렇게 해서 궁전을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초원도시가 생겨난 것이다.
현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도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성벽과 궁전은 완전히 무너져 사라져버렸고 그것이 서있던 부근에 '에르덴 조'라는 라마교 사원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을 뿐이다.
그러나 13세기 당시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이 남긴 기록은 궁전과 그 주변의 모습이 세계 제국의 수도다운 위용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1240년대에 이곳을 방문하고 돌아간 프란체스코파 수도사 기욤 루브룩은 여행기를 통해 그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즉 궁전의 입구에는 은으로 만든 거대한 나무가 서있었는데, 그 밑둥치에는 은제 사자 네 마리가 조각돼 있었고 그 입에서는 말젖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또한 이 나무의 몸통 속에는 긴 대롱이 꼭대기까지 이어져 거기에서 다시 늘어진 나뭇가지를 통해 포도주(葡萄酒), 마유주(馬乳酒), 봉밀주(蜂蜜酒), 미주(米酒) 등 네 가지의 서로 다른 음료수들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 장식품을 제작한 사람은 프랑스 파리 출신의 한 기술자였다.
성벽의 안팎에는 많은 주민들이 거주했는데, 이들은 몽골인 중국인 페르시아인 위구르인 등 민족적으로도 다양했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기독교 불교 도교 이슬람 등 갖가지였다.
한 기록에 따르면 이 도시에는 무슬림 거주구역과 중국인 거주구역이 별도로 설정돼 있었고, 불교사원이 12개소, 모스크가 2개소, 교회당이 1개소 있었다고 한다.
카라코룸에서는 이처럼 다양하고 상이한 민족과 종교가 서로 공존하며 번영을 이루었고, 이는 몽골제국이 지향했던 다원주의를 잘 상징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초원도시는 자생력을 결핍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도시가 번영을 계속하려면 그것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해줄 수 있는 주변의 배후지역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균기온이 낮고 강우량도 충분치 않은 이곳에 농촌지역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따라서 카라코룸의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들은 항상 멀리 중앙아시아나 중국에서 운반되어 와야만 했다.
우구데이가 '잠' (역참)이라는 교통시설을 힘써 정비한 까닭도 실은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과 다른 지역과의 원활한 연계망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인공적인 초원도시는 마치 산소마스크를 달고 있는 환자와 같은 처지여서, 만약 외부로부터의 물자공급이 끊어지면 생존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며, 이 도시를 지탱하는 거대한 국가권력이 사라지면 더 이상 도시로서의 정상적인 기능은 어려워지는 것이다.
몽골제국의 제4대 군주인 뭉케(치세 1251~59)가 죽자, 그의 두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사이에서 치열한 계승분쟁이 벌어졌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근거지를 현재 베이징(北京) 부근에 두었고, 아릭 부케는 몽골초원을 본거지로 삼았다.
이 싸움에서의 승자는 쿠빌라이였다. 그러나 그는 승리한 뒤에도 선조들의 고향인 몽골로 돌아가지 않고, 베이징 근처에 거대한 궁전을 건립하고 이를 '대도(大都)'라 부르며 자신의 새로운 수도로 삼은 것이다.
중국 역사상 소위 원나라의 건립으로 불리우는 쿠빌라이의 즉위는 카라코룸의 쇠퇴에 결정적 타격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도 원제국이 존속할 때까지는 그나마 도시로서의 명맥을 보존할 수 있었지만, 14세기 후반 원나라가 붕괴하면서 카라코룸도 서서히 폐허로 변하면서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오늘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옛 카라코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에르덴조 사원 바깥에 덩그라니 쭈그리고 있는 돌거북이 한 마리가 고작일 뿐이다.
김호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후원 삼성전자
■광활한 카로코롬 유적지 라마교 사원만 '덩그러니'
카라코룸에 처음 가보는 사람들은 현장에 도착해서 잠시 혼란스러워진다. 광활한 초원에 거대한 건물이 하나 있어 "혹시 몽골대제국 시대의 유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건물이 바로 에르덴 조 사원. 1586년에 이곳을 다스린 아브라이잔칸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몽골대제국과는 관련이 없다.
'보석사원'이란 뜻을 지닌 이 사원은 가로, 세로 각각 400㎙ 길이의 담이 둘러쳐져 있어 거대한 성 같아 보인다. 담 중간 중간에는 108개의 돌탑이 세워져 있는데 어떤 이는 돌탑을 108 번뇌와 연결짓기도 한다.
담 안에는 건물 몇 채만이 덩그렇게 있는데 중국 티베트 몽골의 건축양식을 고루 엿볼 수 있으며 못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때는 승려가 1만 여명이나 됐다고 하나 역사에세이팀이 찾았을 때는 고작 30여명이 불경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사진을 못 찍게 하는 등 외부인을 경계했다. 밖에서는 라마교 신도들이 돌주머니를 짊어진 채 담을 돌면서 고행을 하고 있었다.
사원 밖으로 나오자 주민 7~8명이 토산품 판매 노점을 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외부인이 오면 즉석 노점을 열고 그들이 떠나면 다시 철수한다고 한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사진 박서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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