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지" 집착은 엷어지고...나는 누구인가. 진실은 무엇인가. '한국인'이란 자의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질문은 집요하고, 정치적이다. 그러나 그 몸부림도 세대를 지나면서 약해진다. 세대간의 단절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양쪽으로 드리워진 함석지붕 차양이 하늘을 가린 어두컴컴한 골목길' 을 두고 바라크건물이 빽빽하게 늘어선 현월의 '그늘의 집' 은 그 '단절' 의 공간이다.
징용에 끌려나가 한 쪽 팔을 잃은 75세 노인 '서방'에게는 희망없는 공간이나, 공장을 경영하는 열 두살 아래인 재일교포 2세 나가야마에게는 불법체류자들의 값싼 노동력을 공급받는 '희망'의 공간이다.
서방의 아들 친구인 의사 다카모토는 말한다. "이 나라하고 역사문제를 마무리 짓는 건 우리 세대 이후에는 불가능해요.
그걸 영감세대 사람들 자신의 손으로 죽기 전에 마무리 지어 달라는 거예요. 우리들은, 너무나 무력해요. 적당한 돈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만족해 하며 마음도 몸도 풀릴 대로 풀려버렸어요."
현월도 그렇다. 아버지, 할아버지의 역사문제를 떠안고 싶지 않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자문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고민하고 갈등하기에는 의식이 너무 희박하고, 일본사회 안에서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세대가 됐다. '그늘의 집'은 일본에 존재하는 하나의 작은 '커뮤니티'일 뿐이다.
27년전 숙자가 당한 끔찍한 폭력과 중국인 불법체류자들이 동료에게 가하는 집단 린치도 민족적 대립이 아닌 단순히 '돈을 모으고 받고 하면서 일어나는 사건일 뿐이다.
이런 폭력이야말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도 있다는 보편성과 역사의 연속성을 주시하는 현월의 시선은 서방의 앙상한 몸만큼이나 메마르다. 그 메마르고 냉정한 문체야말로 이전 세대와 오늘의 일본을 사는 재일동포 2, 3세 간의 '거리'이다.
그 거리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산다는 오사카시 이쿠노구(生野區, 구민 20만명 중 5만명이 재일동포)의 쓰루하시 국제시장에서도 있다.
입구에 늘어선 김치가게부터 끝에 있는 한국식당까지. 주인에게도, 손님에게도 한국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한국말을 못하는 주인과 일본인 종업원, 가격이 싸고 싱싱해서 그곳으로 김치를 사러 오는 사람들. 그들은 그냥 함께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
청바지에 티셔츠을 입고 나타난 현월은 시장에서 가까운 동네로 갔다. 소설의 바라크건물처럼 처마가 맞닿아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골목의 나무집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깨어진 유리조각, 마른 풀이 버려진 곳임을 말해주었다. '그늘의 집' 은 오사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현월이 이쿠노중학교에 다닐 때 근처에 친구집이 있어서 와 봤다는 바라크건물도 헐려버려 임시주차장이 됐다.
이쿠노구를 가로 지르는 작은 운하를 조선인 노동자들이 건설했다는 사실이 점점 희미해지듯, 제일동포 1세대의 소외와 가난의 '이방지대' 도 존재할 뿐 흔적이 없어진 바라크건물과 함께 잊혀질 것이다. 그것을 소설로 살려낸 현월에게는 분명 한국인의 피와 눈과 냄새가 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아버지 세대와 모국에 대한 거리감,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늘의 집'으로 일본인들이 좀처럼 깨닫지 못하는 일본사회의 일면을 그려냈듯이 지극히 한정된 세계에서 인간군상이 빚어내는 우연과 필연으로 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제대로 형상화한다면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는 인간의 보편성에 접근하리라 믿는다."
그 보편성이 재일동포로서, 일본여자와 결혼한 신세대로서 그에 남겨진 '단절'을 뛰어넘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왠지 돌아서는 모습이 쓸쓸하다. 한국인 동포를 만났기 때문일까.
이대현기자
leedh @ hk. co.kr
■'그늘의 집' 줄거리
컴컴한 골목동네를 못떠나는 희망잃은 동포1세 '서방'
일본 오사카시 동부 습지대 2,500여평에 빽빽이 들어찬 함석지붕 바라크에 불법체류중인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숨죽이며 살고 있다.
75세의 주인공 서방(장인이 '문서방'하고 부른데서 붙여진 이름)도 무위도식하며 68년 동안 '귀신' 처럼 그곳에 살고 있다. 일제 때 징용 나가 한 쪽 팔을 잃은 불구이다.
집 나간 아들은 시체로 돌아왔고, 아내는 이 집단촌 공장에서 일하다 재단기에 팔이 잘려 과다출혈로 죽어 피붙이 하나 없다.
공장장으로 불법체류자를 지배하는 제일교포 3세 나가야마와 아들의 친구였던 다카모토에게 놀림도 당하고 함께 동네 야구경기도 보고, 술도 마신다.
그가 바라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희망'이 없이 재일 한국인으로 그곳에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팔에 대한 보상요구조차 그는 시도하지 않는다.
흑인 할렘가나 우리의 쪽방집 같은 그 집단촌에서 27년 전 곗돈을 갖고 도망치려던 숙자를 다카모토와 20여명의 청년이 집단 구타했던 것같은 폭력이 행해졌다.
지금은 중국인들이 지하은행 돈을 훔쳐 달아나려던 동료의 살점을 펜치로 뜯어내는 끔찍한 집단 린치를 가한다.
그 사건으로 경찰이 조사를 나오고, 경찰 입에서 불법체류자에 대한 처벌 이야기가 나오자, 바라크가 없어질까 두려운 서방은 경찰의 다리를 물어 뜯는다.
■'재일동포 2세' 현월 문학세계
현월(玄月ㆍ35)은 재일동포 2세로는 어린 나이다. 부모가 어릴 때 4.3사태를 피해 일본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오사카 시립 미나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은 포기했다. "재일동포로서 대학을 나와도 사회생황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 아버지 구두공장을 운영하면서 1994년부터 오사카문화학교를 다녔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어느 순간 쓰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매일 소설을 썼다.
"자기표현에 대한 열망이었다"고 했다. 소설이 아니면 좋아했던 록과 재즈로 라도.
'이경의 사생아' 에 이은 두번째 작품 '무대 배우의 고독'이 1998년 하반기 '문학계'에 실려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나에게도 재능이 있구나" 하는 확인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젖가슴'이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르더니 지난해 '그늘의 집'으로 상을 탔다.
그러면서, 한번도 자신이 왜 수상했는지에 대한 적절한 답을 못 찾았다고 한다. "그냥 이렇게 밖에 쓸 수 없었고, 해석과 평가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무대와 인물, 시점만 설정하면 어떤 흐름이 생기고, 장면마다 느끼는 대로 따라 갈 뿐"이라는 그에게 '그늘의 집' 부분부분을 짚으며 물어보는 일은 허망했다.
숙자란 인물의 의미를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처음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인 집단린치도 마찬가지다. 써가면서 생각해 냈고, 그러니까 흐름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현월은 특수성 보다는 인간의 보편성을 이야기하려 한다. 집단촌인 '그늘의 집' 과 그 속에서의 '폭력' 은 재일동포만이 아닌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민족적 대립이 아니다. 곧 한국에서 출판될 두 번째 소설집 '나쁜 소문'도, 4년 전부터 '그늘의 집'과 같은 무대를 배경으로 쓰고 있는 장편소설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그는 김석범 같은 재일동포 1세대 작가들과 색깔이 다르다. 더 이상 정치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한(恨)도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이야말로 '세대 변화' 이다. 재일동포 작가 전체를 민족적 관점에서 보려고 하지만 지금 세대는 다르다"는 현월. 어쩌면 그의 소설쓰기야말로 재일동포 문학의 미래이자 길인지도 모른다.
"정체성의 상실이 아니다. 그들 역시 자신이 일본인이 될 수 없으며, 재일동포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지만 재일동포의 특이성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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