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렁그렁한 눈망울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그럴 일이 벌어졌다. 신기료 장수가 고쳐준 여동생 자라(바하레 시디키)의 낡은 분홍색 구두를 잃었다.힘 없이 집에 돌아온 아홉 살 난 소년 알리(미르 파로크)에게 여동생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조른다. "오빠, 내 구두 고쳐왔지. 빨리 줘."
동생 앞에 선 알리의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잔뜩 겁먹은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벼락이 떨어질게 뻔하다. 할 수 없다.
동생과 협상을 벌이는 수 밖에. 아랫목에서 TV를 보시는 아버지 몰래 열심히 동생과 필담을 나눈다. "내 운동화 같이 신자." "오빠 신발은 낡고 커서 안돼."
동생이라고 호락호락하지 않다. 당장 동생은 학교 갈 때 신을 신발이 없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안되면 뇌물이라도 쓰자.
아깝지만 동생의 몽당연필을 새 연필과 바꾸어 준다. '사정 반, 억지 반' 으로 겨우 달랬다. 오전반인 동생이 먼저 운동화를 신고 학교를 갔다오면 기다렸다가 오후반인 내가 신고 학교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동생의 서둘러 돌아오고 내가 부리나케 달려가도 늘 지각이다.
이란영화 '천국의 아이들' (감독 마지드 마지디)은 재미있다. 지각한 알리가 교감에게 잡혀 거짓말을 하면서 흘리는 눈물조차 우리를 즐겁게 한다.
어린 남매가 낡은 운동화 하나를 교대로 신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빚어내는 해프닝 때문 만은 아니다.
우리의 어린시절 추억이 있고, 이란 영화의 특징인, 마치 현실 그 자체로 느껴지는 아마추어 배우들의 연기에서 생동감 있는 '순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순수는 잃어버린 운동화를 신은 소녀를 발견하고 집까지 뒤쫓아간 남매가 그 소녀의 아버지가 시각장애인이란 것을 알고는 그냥 돌아오는 것에서, 부잣집 아이가 아버지를 따라 정원을 손질하러 간 알리와 처음 만나서도 거리낌없이 노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공장에서 퇴근해 집에서까지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 빈부격차의 현실조차 아이들의 순수 앞에서는 문제의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대신 작지만 소중한 '희망' 을 던져준다. 3등에게 부상으로 주어지는 운동화를 위해 알리는 전국어린이마라톤대회에 나간다.
그에게는 오직 3등만이 목표이다. 경기 장면은 남매가 교대로 운동화를 신기 위해 매일 뛰어다녔던 기억과 어울려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알리는 막판 레이스에서 3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1등을 하는 실수를 범하면서 관객의 마음을 배반한다. 그래서 '천국의 아이들'은 더욱 '순수'하다
■이란 3세대 감독인 마지드 마지디는 선배들보다 확실히 상업적이다. 같은 아이들 영화인 '내 친구 집은 어디인가' 의 거장 키아로스타미가 주저하는 극적 요소를 절묘하게 배치했다.
상처 난 알리의 발을 감싸주는 웅덩이의 금붕어, 그렇게도 바라던 여동생의 구두를 사서는 자전거에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통해 영화와 관객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줄도 안다. 그에게서 중국 장이모 감독의 '책상서랍 속의 동화' 냄새가 난다.
'천국의 아이들'은 1999년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관객상을 수상했고 그 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대현기자
leedh@ 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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