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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독일 3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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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독일 3월 혁명

입력
2001.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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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3월13일 반동적인 '빈 체제'의 메트로폴리스였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 폭동이 일어났다. 그 전 달의 프랑스 2월 혁명을 연료로 점화한 이 시민 봉기는 오스트리아를 핵으로 한 독일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독일 3월 혁명의 기폭제가 됐다.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재상 메테르니히는 런던으로 망명했고, 황제는 출판의 자유를 인정하고 헌법 제정을 약속했다.

이와 함께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역 안에 있던 헝가리 체코 북이탈리아 등지에서도 민족주의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와 함께 독일의 또 다른 핵을 이루던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서도 3월18일 혁명이 일어나 국왕은 자유주의적 내각 구성을 허락하고, 헌법 제정과 의회 소집을 약속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와 함께 독일 민족의 통일 운동도 크게 고조됐다.

그 해 5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국민의회가 구성돼 독일 전역의 대표들이 모여 미래의 통일된 독일의 헌법 제정에 대해 협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봉건 세력의 힘이 여전했고, 아직 힘이 미약했던 부르주아지는 당초에 제휴했던 프롤레타리아가 세력을 키울까 두려워 전제 정권과 타협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독일 통일의 범위를 놓고 오스트리아 중심의 대독일주의와 프로이센중심의 소독일주의로 분열하는 동안 수구파에 의한 반혁명이 진행돼, 6월에는 체코와 북이탈리아의 민족운동이 오스트리아군에게 진압됐고, 10월에는 빈에서도 혁명 세력이 와해됐다.

이어 11월에는 베를린에서도 헌법제정의회가 군대에 의해 해산됐다. 이듬해 5월부터 7월까지 민주적인 독일 헌법을 옹호하며 소부르주아와 노동자들이 남서독일의 라인 지방에서 봉기했지만, 결국 프로이센 군대에게 진압됐다. 혁명은 실패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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