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문학이 위협받고 있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중문학, 통속문학의 장점을 유쾌하게 빌려올 필요도 있다." 마르시아스 심(41)은 주저없이 이렇게 말한다.그가 새로 펴낸 소설집 '명옥헌'(문학동네 발행)은 이 말처럼 대중을 사로잡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을 엿보게 한다.
'명옥헌'에는 심씨가 1990년 '묵호를 아는가'로 등단하기 전후에 썼던 작품들과 지난해 발표한 '마르시아스'에 이르기까지 10여년간 쓴 작품들이 모여있다.
지난해 발표해 화제를 집중시켰던 성애 소재의 연작소설집 '떨림'과 올해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단편 '미'에 이르기까지, 소설가로서 그의 도정을 알 수 있는 작품들이 만화경처럼 펼쳐져 있다.
이야기꾼으로서 소설가의 운명, 1980년 광주의 의미를 문학으로 돌파하고자 했던 그의 의욕, 무엇보다도 심미주의자 혹은 유미주의자로서 우리 생에 드리워진 안개 같은 모호함을 뚫고 나가려는 의식이 작품 곳곳에 숨쉬고 있다.
작품집의 머리에 실린 '마르시아스'는 그가 필명을 본명 심상대에서 마르시아스 심으로 바꾼 이유를 들려주는 소설이면서, 우리 시대의 소설 쓰기 혹은 예술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마르시아스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정령이다. 그는 태양신 아폴로와 피리 불기 경쟁을 벌여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패배한 뒤 마르시아스는 "좋다. 나는 패배자다. 너는 승리자인 천상의 신이지만 나는 지상의 신인 디오니소스의 친구이며 농부의 신이고, 사랑에 빠진 여자들의 애인이다.. 네가 신이라면 나는 예술가다"라고 외친다.
표제작인 '명옥헌'은 1990년대 초반 희망과 전망을 잃어버린 문인들의 내면세계를 여로소설 형식으로 풀어놓은 작품이다.
슬픔, 새들, 희극, 매장 등 한 시대를 대표했던 작품으로 유명 문인들의 이름을 상징한 후 자신은 '묵호'라고 명명하고서 심씨는 실재하는 전남 지역의 정자 '명옥헌(鳴玉軒)'으로 가는 길에 이들의 내면을 보여준다.
허수경 황지우 주인석 임동확 등의 시와 소설을 통해 그는 이 문인들을 "어떤 허허로움, 슬픔, 가엾음, 애처로움, 떨림 같은 것들을 견뎌내는 이들"로 그린다.
전망 부재의 시기에 '내가 간직해야 할 삶의 의미란 결국 작은 것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지엄한 철학임'을 깨달은 주인공은 "백년에 한번씩 숨을 쉬고, 천년에 한번씩 걸음을 옮기는 문학이라는 노동"이 자신의 생업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소설집의 처음과 끝은 이렇게 '예술가소설'이랄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삶의 비극성을 눈부신 서정으로 묘사한 '요시코의 편지', 광주 이야기를 다룬 '감방일기' 등 3편의 단편과 옛 설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신 금오신화' 등 다양한 층위의 작품들이 실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유머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느 작품에서나 기지와 통찰에 넘치는 심미적 이야기꾼으로서 독자를 울리고 웃긴다.
"그의 소설에는 지칠 줄 모르는 입심에서 나오는 즐거운 요설, '텍스트의 쾌락'이 가득하다. 이야기를 그치면 죽게 되어있는 천일야화의 화자와도 같은 작가의 숙명이 숨어 있다."(시인 황지우)
마르시아스 심은 "한층 가벼운 몸놀림으로 소설을 쓰겠다"고 말한다.
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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