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년간 '말로 주고 되로 받는'우(愚)를 되풀이 해온 우리나라의 국제협상력이 올 들어서도 개선될 전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세계 경기침체 등으로 통상ㆍ외교 압력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이는데도 이에 대비한 협상력 강화를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대한협상학회장인 곽노성(郭魯成ㆍ동국대) 교수는 11일 "올해는 남북정상회담, 세계무역기구(WTO) 뉴라운드 협상, 자유무역협정(FTA), 부실 및 공기업 매각 등 국가 장래를 결정할 굵직한 대외협상이 다수 예정되어 있는데도 우리의 협상력은 예전 수준을 벗어나기 못하고 있다"며 "이제는 협상력 강화를 국가적 과제로 삼아 장ㆍ단기 국제협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곽 교수는 특히 "부시행정부가 들어선 미국의 경우 강한 미국 건설과 경기침체의 돌파구로 우리나라에도 통상 외교 안보 등 각 분야에 걸쳐 전천후 압력을 가할 것"이라며 "미국이 협상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는 만큼 대미 협상력을 강화해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할 필요가 높아졌는데도 이에 대한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기대 차재훈(車宰薰 ㆍ국제대학원) 교수도 "세계 각국이 국제협상력이 곧 국가경쟁력이라는 자세로 협상력 강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여전히 안일한 자세"라고 비판했다. 국익을 일관되게 관철할 수 있는 협상전략과 이 같은 협상전략을 추진할 협상지휘부는 물론이고 협상전문가와 협상교육, 협상 사후관리 등 협상의 기본기조차 부실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방한했던 하버드대의 저명한 협상학자인 테이비스 스미스 교수도 이른바 '쌍끌이 협상'으로 유명한 99년의 한ㆍ일어업협정 실무협상 결과와 관련, "한국 공무원들이 6개월만 협상교육을 받았다면 그런 실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전문교육 부재를 꼬집었다.
이 같은 비난에 따라 최근 서울대 동국대 세종대 외교안보연구원 등 일부 대학을 중심으로 국제협상 강좌를 개설했지만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세계 각국은 전문가 양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학은 물론 국무성에도 협상코스를 운영하고 있는 미국 등 서방 선진국들은 물론 일본도 외무고시에 협상론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기왕에 양성된 협상인력조차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다.
통상교섭본부는 98년 각 부처의 통상전문가 43명을 충원받아 출범했지만 순환보직 원칙에 따라 대거 해외 대사관 등으로 나가 지금은 10여명 정도만 남아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서창배(徐暢培) 전문연구원은 "세계무역기구(WTO) 뉴라운드 협상이 올해부터 본격화할 예정인데도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에 참여했던 실무진들이 모두 자리를 옮긴 상태"라며 "전문인력이 해당 기관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인사시스템을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말 합의된 주한미군 지위협정(SOFA) 개정협상에서 미국측은 20년 넘게 SOFA 문제만 다룬 전문가들을 내보내 한국측을 놀라게 했다.
김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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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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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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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진단
국제협상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국제협상 능력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협상이 말장난이 아니라 테이블 위의 국제전쟁으로 국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단기적으로는 전문가 양성과 활용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곽노성(郭魯成ㆍ동국대 교수)대한협상학회장=일본 외무고시에 협상론이 있다. 우리나라는 국제법 국제정치학 어학 등이 전부다. 외교관 교육 역시 에티켓, 지역정치, 국제정치론이 주종이고 협상에 대해서는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 협상을 할 사람이 협상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국제협상 테이블에서 관료처럼 행동하고, 국내에서는 엘리트이면서도 정작 협상에서는 무능한 사람들이란 소리를 듣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대우와 포드 협상시 포드는 2,000만 달러를 투입해 전문가 500명을 동원했다. 시간당 500달러를 받는 전문가도 고용했다. 이들은 막후에서 '이번 협상에는 누구를 내보내라''약은 올리되 폭발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등의 구체적인 지시를 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나서기도 한다.
협상의 원칙에서 세부 지침까지 주도면밀하게 준비한다. 이에 비해 우리는 협상을 전문가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현업에서 일하던 사람이 나가서 협상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국내 협상전문가는 협상학회 멤버가 거의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층이 얇다. 95년 만들어진 협상학회는 전공학자, 로펌의 협상 변호사, 공인회계사 등 200여명이다.
◇전성철(全聖喆)세종대 세계경영대학원장=과거에는 총칼로 전쟁을 했다면 이제는 비즈니스 전쟁 시대다. 비즈니스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승부처가 바로 협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협상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전문가도, 전문가를 양성할 기관도 없다.
예를 들면 우리 기업들은 협상이라곤 전혀 해본 일이 없는 총무부장을 내보낸다. 반면 선진국 기업은 전문적인 협상전문가가 총무부장의 지원을 받아 협상을 하도록 한다. 선진국 기업들은 협상은 당연히 전문가의 일이고 그래서 협상에는 반드시 전문가를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 대기업에는 직함 자체가 협상가(Negotiator)인 사람도 있다.
국제협상의 경우 강대국의 프리미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탄탄한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하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국제협상 테이블에서는 보편적인 합리성이 힘보다 강하다. '우리는 강대국이 아니니까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피해의식과 패배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차재훈(車宰薰) 경기대 국제대학원 교수='쌍끌이'로 유명한 99년의 한ㆍ일 어업협정 실무협상은 우리나라의 협상에 대한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은 200여명의 전문가가 100일간 합숙까지 하며 협상을 준비한 반면 우리는 서너명의 해양수산부 담당자가 아우트라인 정도만 익힌 상태에서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장ㆍ차관 등 본부의 협상 최고 책임자가, 또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협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제대로 모르고 있다. 협상준비에 무게가 실리지 않는게 당연하다. 게다가 협상 결과가 나쁘면 책임을 뒤집어 쓰기 일쑤이다. 협상, 특히 국제협상은 잘 해봐야 본전이라는 의식이 팽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올해는 남북정상회담, 세계무역기구(WTO) 뉴라운드 협상, 미국 부시행정부와의 각종 협상 등 국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협상이 잇따라 열린다. 이대로라면 제2, 제3의 쌍끌이 사건이 또 생기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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