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 시대'가 오는 듯하다. 나치즘과 사회주의로 대표되는 20세기 전체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유태계 독일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에 대한 국내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올 초 아렌트에 대한 첫 본격적 연구서인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김비환 지음, 한길사 발행)이 출간된 데 이어 올해 안으로 그의 주요 저서 10여권이 잇따라 번역될 예정이어서, 아렌트 사상이 21세기 국내 철학ㆍ정치학계의 첫 화두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전체주의 기원을 치밀하게 분석해 아렌트를 일약 지성계의 스타로 만들었던 '전체주의의 기원'(1951)이 이진우 계명대 교수에 의해 번역되는 것을 비롯해, '어거스틴에 있어서의 사랑의 개념' (1929)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혁명론'(1963) '공화국의 위기'(1972), '정신의 삶' 3부작 (1978) 등 그의 주요 저서 대부분이 국내 소장 정치학자와 철학자에 의해 번역된다.
야스퍼스와 하이데거의 제자로 순수철학도의 길을 걷던 아렌트는 나치즘의 광풍 아래서 권력과 지배의 문제와 정면 대결, 탁월한 정치사상가로 거듭났다.
유태인으로서 정치적으로 핍박 받던 패리아(pariahㆍ주변인)였던 까닭에 이에 대한 자각을 통해 인간의 정치성을 치열하게 파고 들었던 것.
독창적 사유와 냉철한 통찰력으로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아렌트는 "책임감 없는 공허한 급진주의자"에서부터 "대중사회에 비판적인 보수 반동주의자"까지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냉전 콤플렉스가 가신 90년대에 이르러 국내외적으로 집중적 조명을 받고 있다.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양 극단을 뛰어넘는 정치사상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재평가다.
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유태인 평의회의 적극적 협력 아래 이뤄졌다"고 자기 비판해 유태계의 맹렬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유태인 핍박은 유태인의 '무세계적 실존', 즉 정치적인 현실로서의 공적 세계에 대한 무관심과 배타적이고 자기 중심적 태도가 자초한 측면을 가진다고 냉철하게 분석한다.
이는 전체주의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도 닿아 있다. 원자화한 개인주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 고독한 대중의 '무세계적 실존'이 전체주의 출현의 필요조건이었다고 설명한다.
아렌트에게는 극단적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는 동전의 양면이었던 셈이다. 그가 공적 세계에 대한 대중의 정치적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정신의 삶 1부_사유'를 번역중인 홍원표 박사는 "아렌트 번역을 위해 소장 학자들끼리 꾸준히 세미나를 가져왔으며 아렌트 학회도 준비중이다"며 "신자유주의와 신우익이 발흥하는 현재 아렌트 사상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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