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하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까. '러브레터' '쉘 위 댄스' ' 철도원' 같은 멜로물, 코미디, 휴먼드라마도 있지만 여전히 칼을 든 비장한 '사무라이' 일 것이다. 그만큼 '사무라이' 라는 존재는 일본과 일본정신의 상징이다. 때문에 우리로서는 겁나는 존재인 셈이다.사무라이를 가장 빼어난 미학적 존재로 만든 사람은 '7인의 사무라이' '카게무샤' 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었다. 한 폭의 빼어난 회화를 연상케 하는 전투장면, 일본의 자연, 정(靜)과 동(動)을 배합한 영상표현,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내면과 시각효과, 일본의 전통미학을 드러내는 형식미 등이 그의 미학이었다.
1999년 작 '올빼미의 성'은 그것에 대한 향수이자 추억이다. 이마무라 쇼헤이, 오시마 나기사와 함께 일본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노감독 시노다 마사히로(70)는 전통미학에 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액션과 환상을 조화시켜 그의 35번째이자, 한 편의 대중적 시대극을 만들었다.
나오키상을 수상한 시바 료타로의 동명 장편소설(1958년)을 극화한 '올빼미의 성'은 엄격한 의미에서 사무라이 영화가 아니다. 명예와 충성을 내세우는 특권층 사무라이와 달리 군주들과 계약을 맺고 암약하는, 일본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닌자의 이야기이고, 그들의 사랑이야기이다. 검은 장속을 입고 어둠 속에서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했던 비운의 존재들. '올빼미'는 그들의 암호였다.
전국시대말,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던 오다 노부나가가 닌자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쥬조(나카이 키이치). 닌자 최대 명문인 '이가'의 후계자로 10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던 그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노부나가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암살하라는 청부를 받는다. 실화의 성격을 띠며 실존 인물과 사건(임진왜란)이 나오지만 영화는 '어둠의 자식' 과 '복수' 라는 단순한 인물과 사건을 따라가지 않는다.
닌자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쥬조와 그것을 거부하고 사무라이가 되려는 고헤이, 쥬조 앞에 창녀로 가장해 나타난 이에야스의 첩보원 고하기(츠르타 마유), 스승의 딸인 키사루(하즈키 리오사이). 네 명의 얽히고 설킨 운명과 대결, 비극과 사랑이 사계절의 빼어난 풍광과 사각의 구도, 눈부시고 깊은 빛과 색깔에 고이 입혀진다.
어두운 밤, 보름달을 배경으로 그림자 같은 오사카성 지붕에서 쥬조와 고헤이가 벌이는 결투와 죽음조차 아름다운 그 시각적 마력 속에서 영화는 인간의 정체성이란 철학적 질문을 한다. 고헤이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못하고 죽고, 쥬조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고하기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사랑하는 쥬조를 따라 나선다.
아키라의 영화가 그렇듯 '올빼미의 성' 도 다분히 감상적이다. 극중 히데요시조차 "히데요시 역할만 할 뿐, 나도 내가 진정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일본영화는 역사와 전통양식을 고집하는 시대극이든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코미디든 지금도 끝없이 인간본연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올빼미의 성'은 일본에서 200만명을 동원하는 흥행을 기록했고, 지난해 부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이대현기자
leed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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