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들이 화재현장에서 잇달아 목숨을 잃고 있다. 지난 4일 서울에서 6명이 순직한데 이어 7일 부산에서 또 1명이 순직했다.그들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을 기리는 애도 속에서 소방관의 열악한 근무여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형사고 뒤에 으레 따르는 '반짝 반성'이라고 보고싶지는 않다. 최근 우리사회에는 이 시대가 잃어버린 가치에 대한 그리움, 그 가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열망이 분명히 움트고 있다.
지난달 일본에서 이수현이라는 한국유학생이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지하철로에서 목숨을 잃었을 때 일본을 뒤흔든 애도의 본질은 잃어버린 가치에 대한 각성이었다고 생각한다.
일제침략의 피해자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가진 한국청년이 그 악연을 인간애로 갚았다는 감동적인 드라마가 일본인들의 가슴을 때렸던 것이다. 분향소에 줄을 서서 눈물 흘리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한국인들의 가슴에 같은 감동을 전염시켰다.
그런 분위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일어난 소방관들의 순직사건은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함을 다시 일깨워준다.
술에 취해 지하철로에 넘어졌던 일본인, 어머니가 잔소리한다고 집에 불을 지른 아들, 그 '한심한 인간들'의 생명 또한 존엄한 것임을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 일러주고 간 젊은이들 앞에서 우리는 부끄럽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우리 사회가 부끄럽다.
소방관들의 순직 뒤에 언론이 파헤치는 그들의 근무여건을 보면 더욱 낯을 들 수 없다.
우리는 가장 소중히 해야 할 것들,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무시해 왔다. 목숨을 걸고 위험 속에 뛰어들어야 하는 소방관들은 기본장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이번에 순직한 6명은 고글(적외선 투시경)도 산소마스크도 없이 맨 얼굴로 불 속에 뛰어들었다. 고글을 썼으면 벽이 무너지는 것을 빨리 보고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동료 소방관들의 항변에 할말이 없다.
소방관이나 경찰이 어떤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느냐가 그 나라의 문명수준을 말해주는 척도다. 박봉과 격무와 열악한 여건 속에 지치고 불만스러운 경관들이 거리에 서있는 나라가 문명국일수는 없다.
"고글이 있었으면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소방관들이 안타까워하는 나라에서 수 천억 수 백억 의 정치자금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어찌 정치인들이 '도둑놈'소리를 안 듣겠는가.
순직한 소방관이 처음 국립묘지에 묻힌 것은 불과 7년전인 94년이었다. 순직한 소방관들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은 안보우선의 시대에 오랫동안 무시됐다.
겨우 90년대 중반에 그 청원이 받아들여졌으니 우리사회의 문화척도를 짐작할만하다.
이번 사건을 겪으며 '소방관의 기도'를 처음 읽었다. 누군가 미국의 소방관련 책자에서 그 기도를 읽고 일부 번역하여 서울소방방재본부 사무실에 걸어두었던 것이라고 한다.
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안을 수 있게 하시고 / 공포에 떨고있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그리고 신의 뜻에 따라 저의 목숨을 잃게 되면 / 신의 은총으로 / 저의 아내와 가족을 돌보아 주소서...>
많은 직업들이 이와 비슷한 다짐이나 윤리강령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 읽는 소방관의 기도처럼 아름다운 다짐을 읽은 적은 없다.
소방관이라는 직업은 다행히 최근 관심이 높아져서 많은 젊은이들이 지원한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모집정원을 채우기 힘들었는데, 작년에는 15:1을 기록했다고 한다.
어지러운 시대에 이 기도의 아름다움에 끌리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에서 희망의 조짐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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