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아내와 두 자녀에, 평소 일본식 이름(通名ㆍ통명)으로 행세하며, 국적은 한국. 이 신상정보로는 평범한 재일동포의 모습이 떠오르지만, 주인공은 북한군 하사 출신 민홍구(閔洪九ㆍ39)씨다. 적당히 살이 붙고 무테안경을 낀 밝은 얼굴이 걱정 없는 샐러리맨의 전형이다.얼굴사진은 물론, 몇 줄의 동정이 일본언론에 등장한 것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그의 망명사건 이후 처음이다. 2월 26일자 아에라(AERA) 지에 보도된 기사다.
■북한과 일본의 관계를 꽁꽁 얼어붙게 했던 그의 일본망명은 83년 10월이었다. 북한산 대합을 수입하기 위해 남포 항에 정박중이던 제18 후지산(富士山)호에 잠입한 민 하사는 기관실에 숨어 일본 상륙에 성공한다.
어머니 약을 구하려고 숨어 들었다던 그는 해상보안청 조사과정에서 정치적 망명을 요구해 외교문제를 일으킨다. 남포에 있는 부대의 보급계에서 근무한 그는 보급품을 빼돌리다 발각돼 처형 직전 부대를 탈출한 것이다.
■그는 담배 의류 등을 빼돌려 상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인심을 샀다. 그렇게 빼돌려 축이 난 물건은 하급부대에서도 같은 일을 당해 말단부대에 가면 턱 없이 모자랐다.
얻어먹은 상사들이 음으로 양으로 봐주고 정보를 귀띔해주었다지만, 보급계 동료들과 모임을 만들어 가까이 지낸 것은 스스로 묘혈을 파는 행위였다.
다음날 체포 당한다는 정보를 알게 된 것도 윗사람들과 친한 덕분이었다니, 목숨을 건진 것도 그 배포 때문이리라.
■그의 망명은 일본인 두 사람을 인질로 만들었다. 후지산 호가 다시 남포에 입항하자 북한당국은 베니코 이사무(紅紛勇) 선장 등 2명을 스파이 혐의로 구속해 버린 것이다.
그들은 7년간 억류생활을 하다 90년 북일 국교교섭 시작 때 풀려났다. 민 씨가 찾아가 위로의 뜻을 전하자 선장은 별 유감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4년간 수용소 생활 끝에 자유인이 된 그는 지금 도쿄 인근 간판회사에 다니고 있다. 단골 술집에 앉아 웃는 얼굴에 극적인 인생유전의 그늘은 안보였다.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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