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게임에 빠져 꿈도 게임으로 꿔요. 게임을 하지 않을 땐 머리가 어지럽고 터질 것 만 같아요.가족도, 친구도 자꾸 싫어지고 학교도 그만두고 싶어요."
한 사이버 중독 상담 사이트 게시판에 뜬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의 호소다. 이처럼 인터넷 게임, 음란물 등에 중독돼 심신이 황폐화한 청소년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급기야 폭력 게임에 중독된 중학생이 친동생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달 초 발생한 대구 사제폭탄 폭발 사건의 범인은 폭탄사이트에서 제조법을 배운 고교 2년생으로 밝혀졌다. 지난해 12월 이후 자살사이트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청소년도 3명이나 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이버 중독의 폐해가 더 이상 일부 '비행 청소년'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해 11월 서울YWCA 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이 서울지역 중ㆍ고생 1,0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중증 사이버 중독자가 9.6%에 달했다.
청소년 인터넷 이용자 676만명 중 60만 여명이 심각한 사이버 중독에 빠져있는 것. 이들이 인터넷에 넘쳐나는 유해 정보들을 반복적으로 접할 경우 극단적인 범죄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그러나 규제 장치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현재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서 유해정보 모니터링을 담당하는 인력은 고작 20여명. 인터넷 업체 가운데 모니터링 요원을 둔 곳은 30%, 성인방송 등 청소년 유해정보 사업자중 성인실명확인 서비스를 실시하는 곳도 3%에 불과하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최근 만난 한 외신기자는 한국이 마치 거대한 '게임전사집단' 같다면서 청소년을 폭력게임에 무방비로 풀어놓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정보화 교육에만 치중, 올바른 인터넷 이용법을 가르치는 데는 소홀한 것도 문제다.
권정혜 고려대 심리학과교수는 "일단 중독증에 빠지면 치료하기가 매우 어렵다"며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스스로 자제력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인터넷의 특성과 폐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도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청년의사 인터넷중독 치료센터 김현수(정신과 전문의) 소장은 "청소년 사이버 중독 관련 사건들이 터졌을 때 호들갑만 떨 것이 아니라 왜, 어떻게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체계적으로 연구해 유사 사건 재발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게임 끔찍할수록 인기
'길거리에 널려 있는 시체들, 사방에 흥건한 피, 그 사이로 손에 피묻은 칼과 총을 들고 걸어가는 주인공'
요즘 청소년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액션게임 '바이오하자드'의 한 장면이다. 이처럼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게임들이 청소년들을 유혹하고 있다.
장래 프로게이머를 꿈꾸는 중학생 A(15)군은 "PC를 갖고 있는 친구들의 대부분은 바이오하자드나 퀘이크 처럼 총을 쏘고 적을 때려부수는 내용의 액션게임을 한 두개씩 갖고 있다"며 "게임에 총을 쏘거나 피를 흘리며 죽는 내용이 없으면 시시해서 거들떠 보지 도 않는다"고 말했다.
시중에 판매되는 PC용 게임들은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을 경우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청소년들은 구매할 수 없는 '18세 이용가' 판정을 받고 출시된다. 그러나 초고속인터넷으로 게임을 주고받는 청소년들에게 심의등급은 허울에 불과하다.
무기를 휘두르면 적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디아블로2', 총을 쏘면 맞은 부위의 신체가 떨어져 나가는 '솔저 오브 포춘' 등은 잔인한 내용을 삭제하고 15세 미만의 청소년은 이용할 수 없는 '15세 이상가'의 판정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버젓이 즐기고 있다. 인터넷의 불법복제소프트웨어 사이트인 와레즈 사이트에서 전송받거나 전자우편을 통하면 손쉽게 게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사이트에서만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온라인게임은 종종 실제 폭력으로까지 이어진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다룬 '리니지'의 경우 게임속에서 쓰이는 도구를 얻기 위해 암거래를 하거나 결투에서 진 분풀이를 하기 위해 상대방을 찾아가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벌어진다. 리니지 게임을 즐기는 L(31)씨는 "게임에서 무리를 지어 같은 편이 아닌 사람의 캐릭터를 집단 공격하거나 따돌리는 경우가 많다"며 "더러는 조직폭력배들처럼 게임이 아닌 실제 공간에서 싸움이 벌어질 때도 있다"고 말했다.
게임의 폭력성이 가장 심각한 곳은 전자오락실로 불리는 아케이드게임장. 대부분의 전자오락실에는 내용이 폭력적이고 잔인해 국내 출시가 불허된 PC게임인 '하우스 오브 데브'의 아케이드게임기가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놓여 있다. 이 게임기에는 실제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 모형의 총이 부착돼 사람을 많이 죽이면 점수가 올라가는 방식이다.
플레이스테이션, 드림캐스트 등의 가정용게임기도 예외가 아니다. 인육을 먹거나 토막을 내는 엽기적인 내용이 상당수여서 충격을 주고 있다.
이들 게임 타이틀은 대부분 일본에서 밀수된 것으로 7만~8만원대의 고가인 데도 구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게임타이틀 판매업체 직원 K(25)씨는 "지난해 식인을 주제로 다룬 엽기 게임인 시맨의 경우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내용이었는데도 없어도 못 팔 정도였다"고 말했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정욱 웹캐스팅 게임팀장은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거쳐 문제가 발견되면 시정 및 폐쇄 조치를 내리고 있지만 단속인력 부족 등으로 어려움이 많다"며 "무엇보다 가정에서 청소년들이 게임에 지나치게 심취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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