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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20)중세 유럽에서 지리적 지식과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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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20)중세 유럽에서 지리적 지식과 지도

입력
2001.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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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년의 일이다. 중국에서 원나라가 망하고 유라시아대륙에서 '몽고의 평화'가 사라지고, 유럽에서는 중세말의 위기가 나타나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백년전쟁'(1337~1453)이 벌어지던 때였다. 당시 프랑스 왕은 샤를5세(재위 1364~80)였다.그는 몸이 쇠약하고 기사로서는 체격도 볼 품 없었지만 '현명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려깊은 인물로서 백년전쟁 초기의 패배를 만회하고 격렬한 내전을 극복하여 일시적으로 프랑스 군주제의 위신을 회복하였다.

음악과 독서의 애호가였던 그는 이때, 이베리아반도에 위치한 아라곤의 국왕 페드로4세(1336~87)에게 지도 제작을 의뢰했다.

당시 카탈루냐의 지도제작술은 절정에 있었고, 페드로는 최고의 지도제작자로 이름 높았던 유태인 아브라함 크레스크에게 그 일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카탈루냐지도'는 남아 있는 중세 지도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지리적 지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평판이 높다.

현재 이 지도는 파리에 있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샤를5세가 문예의 후원자답게 '왕립도서관'을 만들어 지도를 보관한 것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카탈루냐지도는 모두 12쪽으로 되어 있다. 앞부분의 4쪽은 달력, 태양, 달, 별자리, 황도의 경로 등 천문학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나머지 8쪽이 '세계지도(Mappamundi)'를 이룬다. 한 쪽의 크기가 69 x49cm이니 지도만도 69cm 3.9m에 이르는 거작이다.

지도 가운데 앞부분의 4쪽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과 소아시아 반도, 지중해 연안의 중동과 아프리카지역을 꽤 자세하고 정확하게 보여준다.

나머지 4쪽은 중동에서 중국, 인도에 이르는 지역을 보여주며, 동쪽 끝에 '카올리(Kao-li)'를 표기하여 고려의 존재를 알려주지만 일본을 말하는 '지팡구(Zipangu)'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유럽이 14세기 말에 카올리나마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몽고제국을 통한 지리 지식의 확대를 입증해준다.

이 지도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요즈음 지도와 다른, 회화같은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채색이 호화롭다.

바다가 푸른 줄무늬, '홍해'는 붉은 색, 강은 진한 청색의 톱니자국, 산맥은 황색 바위산, 큰 도시는 성곽, 기타 도시는 점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바탕은 옅은 황금색이다. 각 지역에는 지배자들의 형상이나 문장(紋章)이 그려져 있으며 여백은 글귀로 채워져 있다.

다음으로 아시아가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은 지중해를 경계로 유럽과 아프리카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유럽중심적이다.

유럽은 유라시아 대륙의 작은 일부인데도 '전세계'의 4분의 1에 달하며, 지중해의 윤곽은 실제에 가깝고 사실적인 반면에 나머지 지역은 추상적이고 동쪽 끝은 아예 둥그렇게 처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기독교적이어서 많은 신화와 설화를 전해준다.

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의 위치를 차지하며 북동쪽 끝에는 '낙원'이, 사탄에 미혹되어 하늘나라에 대항하는 '곡'과 '마곡'이 낙원 위쪽에 자리하고 있고 많은 기독교 왕들이 인도나 기타 지역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지도 전면에 '항정선(航程線)'이 정교하게 그어져 있다는 점이다. 주요 도시나 섬을 중심으로 방사선이 교차하고 있으며, 바다나 육지의 항로에는 배나 낙타, 나귀의 행렬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어떻게 해서 크레스크는 이런 지도를 만들 수 있었을까? 중세 유럽에는 크게 지도 제작의 네 가지 전통이 있었다. 많이 남아있는 순서대로 꼽자면 '세계지도', 해도, 지방도, 천문도 등이다. 이 네 가지는 뚜렷하게 구분되며 14세기에 와서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오늘날 지도란 정확한 방위와 위치를 알려주는 용도로 쓰인다. 즉 정확한 지리적 정보야말로 좋은 지도의 요체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천문도를 제외하면 해도만이 이러한 의미의 지도였다. 해도는 선원들의 경험에 입각해서 실제 항해를 위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카탈루냐지도가 비교적 정확하게 지중해를 표기한 것도 이런 해도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나침반의 사용을 입증하는 항정선 말고는 '투사법'이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에 보이는 좌표대와 같은 높은 수준의 지도제작술은 15세기에 들어와서야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일반화한 것은 16세기의 일이었다.

'세계지도'와 지방도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지도'는 기독교 세계관을 보여주기 위한,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도해나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원형의 세계가 반구 모양의 아시아와 지중해를 경계로 하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반구를 구성하고, 그 밖을 바다가 둘러싸며, 돈 강과 나일 강이 아시아와 유럽,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나누고 있다.

이 세 대륙에 기독교는 노아의 세 아들인 셈, 햄, 야벳의 이름을 덧붙여 가치와 등급을 부과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사의 3대 사건인 세계의 창조, 예수에 의한 구원, 최후의 심판이 상징체계를 통해 '세계지도'에 각인되었다.

중세 말이 가까워지면서 '세계지도'는 훨씬 풍성한 내용을 갖게 되며 카탈루냐지도는 그 점을 웅변하고 있다.

이에 비해 지방도는 주요한 건축물, 예컨대 대성당 같은 것을 과장해서 그려내 특정 도시나 지역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조감도였다.

중세에 만들어진 지도가 보편종교인 기독교에 걸맞게 '세계' 전체를 다루거나 실생활의 공간인 국부적인 지역에 국한했음은 서양 중세의 이중적인 구조, 즉 보편세계의 이념과 폐쇄적인 생활공간이 교착하였던 결과이다.

그러기에 지도는 사실적일 필요가 없었다. '세계지도'가 통제할 수 없는 이승의 우주를 표상하는 것이었다면, 지방도는 친숙한 세계의 징표였던 것이다.

하지만 카탈루냐지도는 '세계지도'의 전통과 해도의 사실성을 결합시킴으로써 르네상스를 예고하였다.

사하라 사막을 '황금의 강'이 관통하고 있고 동남아시아에 '반인반조(半人半鳥)'의 인어가 살고있다는 전통적인 설화에 얽매여 있기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카르피니, 루브룩, 마르크 폴로와 같은 13~14세기의 여행기를 반영하여 특히 아시아의 지리적 표상을 크게 변모시켰다.

'몽고의 평화'로 말미암은 유라시아 교역권의 등장 자체가 이미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유럽은 스스로를 아시아와 대별되는 기독교세계 그 자체와 동일시했고 이로써 새로운 문화적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카탈루냐지도는 잘 보여준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협찬 삼성전자

■천문학 발달했던 사마르칸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에 있는 울루그 베그(1393~1449, 현지 발음은 '울룩 벡'이다)의 천문대 유적은 아주 조촐했다.

사방이 훤한 아프로시압언덕 동쪽의 유적지에서 보이는 것은 사람 키 세배 정도 되는 사각형 문 뿐이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지하가 3m 정도 깊이로 파여 있는데 가운데로 천문관측기구를 굴렸다는 레일만이 길게 반대편 지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은 1420년 건립 당시만 해도 전세계에서 가장 좋은 천문대였다. 지도가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는 별을 보며 지상의 길을 알았다. 천문대가 좋다는 것은 육로에도 밝았다는 뜻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는 3층 높이로 원형 천문대가 있었는데 건물 직경만도 48m(다른 기록에는 76m)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곳에는 육분의, 상한의, 해시계등이 갖춰져 있어서 이곳의 관측을 바탕으로 울루그 베그는 그리

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12세기동안 바뀌지 않아온 천문 상식들을 수정했다. 울루그 베그는 그때 이미 1년의 길이를 365일 5시간 49분 15초로 계산해냈다고 한다.

1437년에는 992개 별의 위치를 밝힌 '지디 이 자디드술타니'라는 당대 최고의 천문도를 발간했다.

그럼 그는 천문학자인가.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그는 제2의 징기즈칸이라는 티무르 대제(1370~1405)의 손자로 1447년부터 3년간 티무르제국을 다스렸다. 그는 또한 코란을 외울 수 있는 '하피즈'였으며 1424년에는 이슬람 교육기관인 마드라사를 사마르칸드에 열었다. 이곳에서는 천문학도 가르쳤다.

그는 통치자로서는 별로 능력이 없어 아들에게 피살되었는데 그 후 사마르칸드는 천문학의 중심에서 서서히 잊혀져갔다.

천문대도 파괴되어 버린 것을 1908년에야 러시아 천문학자 비아트킨이 재발견했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육분의를 지탱했던 땅속의 오목한 부분이라고 한다.

울루그 베그가 세운 마드라사만은 레기스탄 광장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가운데 네모난 마당을 둘러싼 건물은 수많은 방으로 나뉘어 있는데 세 평 남짓한 방은 계단으로 연결되는 일종의 복층구조.

문 없는 다락 형태의 위층은 잠자는 곳이고, 아래층은 공부방으로 학생 1명이 방 1개를 썼다고 한다. 지금은 방마다 사마르칸드의 상인들이 점거하고 카페트나 수직천, 조잡한 공예품등을 팔고 있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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