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정서의 형상화에 주력해 온 고재종(41)씨가 여섯번째 시집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시와시학사 발행)를 냈다. 그는 눈부신 언어감각으로 농촌의 내밀한 정경을 보여줌으로써 80년대 이후 농촌시의 대명사로 불렸다.3년 전까지만 해도 고씨는 전남 담양에서 3,000여 평의 벼농사를 지으며 소를 키우던 농부 시인이었다.
하지만 건강상의 이유와 "너나 시골에서 살지 아들까지 촌에서 키울래?" 하는 주위의 권유와 핀잔 때문에, 지금은 광주에 와 시 계간지 '시와 사람'의 편집을 맡고 있다.
농촌을 떠났어도 그의 마음의 눈은 여전히 앞들의 나락밭과 계곡의 물너울, 집 근처의 탱자울과 능금밭 주변을 서성인다.
오히려 농촌시, 혹은 농민시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연과 우주의 합일을 노래하는 자연시, 생명시의 경지로 드넓게 나아간다.
꽃들이 망울을 터뜨리고 강물이 몸을 푸는 이즈음의 농촌 정경을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저 강변 마을마다 매화꽃은 터져/ 강물은 다시 풀리고/ 이 아침, 사람들은 보리밭으로 나간다/
/ 뼈가 마르는 외로움에 지친/ 저 참절의 먹때왈빛 얼굴들/ 날파리 떼 일기 시작하는 강물에 씻고 또 매화꽃을 바라본다/
/ 보아라, 저 유장한 강물보다/ 더한 그리움의 속절들 있어/ 서러운 나라와 폐허의 마음을 딛고/ 꽃을 바라보는 사람들'('꽃 터져 물 풀리자'에서)
시집의 2부에 묶인 시들은 여전히 농촌을 지키는 사람들, 그의 표현대로 '참절의 먹때왈빛 얼굴들'이 짊어지고 있는 노동에 대한 안쓰러운 시선이 뚜렷한 현장시들이다.
'상처에 대하여'는 그 한 절정이다.
'솔가지 꺾던 낫날에 왼손 집게손가락을 날렸다지요. 두엄자리 뒤던 쇠스랑날로 오른쪽 발등을 찍었다지요. 거친 밥 독한 소주에 가슴앓이 이십 수 년, 복부의 수술자리는 시방도 애린다지요.
좋은 일은 다 잊었는데 몸의 상처론 환히 열리는 서러움들, 참으로 야릇하다고, 이게 다 몸으로 살아온 탓 아니겠느냐고 활짝 웃는 얼굴의 주름살.
그건 그대로 논밭고랑이네요. 마치 앞강 잉어들의 비늘무늬가 그들이 늘 헤살치는 물결을 닮았듯이, 봄날 당신이 잘 갈아논 밭을 닮았네요. 여기에 무얼 심을 거냐고 했더니 이제 복숭아를 심겠다네요. 암종으로 먼저 간 아내가 그토록이나 좋아하던 복숭아라네요'('상처에 대하여' 부분)
고씨는 "80년대적인, 농촌현실에 기반한 계급이익의 대변보다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에는 농촌에 발을 딛고서도 그것으로 생명 일반의 길을 세우는, 맑은 '정화의 언어'가 가득하다.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 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 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冬安居(동안거)' 전문). 외진 삶의 현장에서 하늘로 통하는 길을 보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은 어느새 농촌의 흙과 자연, 사람의 길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는 눈시린 경험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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