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의 좋은 의미란 열정일 텐데, 이제 열정이란 것은 약으로 쓰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는 사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열정은 창조적으로 전화되지만 중독은 극심한 소모를 가져올 뿐입니다."소설가 함정임(37ㆍ사진)씨가 신작 중편 '아주 사소한 중독'(작가정신 발행)을 발표했다.
그의 이번 소설은 놀랍고도 반갑다. 무엇보다 그의 전신(轉身)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90년대 한국문학의 희귀하고도 값진 리얼리스트였던 남편 김소진이 떠난 이후 함씨는 그 흔적에서 오래 머물렀다.
소설집 '동행'이 그러했고 장편 '행복'도 그랬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중독'은 함씨가 스스로의 작품세계를 확고히 다시 찾았음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힌다. 함씨 자신도 "이제 가야 할 길이 조금 보이는 느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중독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되 극심한 카오스의 사랑이다. '너무 풍요로워서 허한, 너무 넘쳐서 피곤한 세상'인 이즈음의 사랑 이야기다.
함씨는 열정이 아닌 중독된 사랑에 스스로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남녀의 모습을 통해, 미로에 빠져버린 탈현대적 생의 중독성을 비판하고 있다.
주인공 '그녀'는 케이크 디자인이 직업인 서른여섯 살의 여자다. 호텔에서 케이크의 맛을 감별하는 '혀'의 전문가이다.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단맛에, 혀로 대표되는 몸의 온 오감을 집중시켜야 하는 그녀의 직업은 삶의 기계적인 반복에 중독된 우리의 현실을 대변한다.
그녀가 유학갔던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그녀보다 세 살 연하인 유부남의 남자 주인공 '그'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대학 강사.
정말이지 너무 많은 책을 읽고 지식을 너무 많이 쌓은 데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머릿속을 단순하게 만드는 일밖에 주어진 것이 없는, "씌어진 책은 모두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다. 한국에 돌아온 둘의 '혀' 를 매개로 한 욕망의 스토리가 소설의 줄거리다.
주인공들의 사회적 조건이나 자기 기만 따위가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질 정도의 섹스 행위, 그들의 의식의 흐름을 작가 함씨는 거침없이 표현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 화가 쿠르베의 저 유명한 그림 '세상의 기원' 등이 그 모티프가 된다. 사랑을 열정이 아니라 중독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그녀는 그가 떠난 후 잠시 실성(失聲)과 이명(耳鳴) 증세를 겪지만 다시 '새로운 중독'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더 이상 사소해질 수 없을 만큼 사소해진 사랑, 그것을 더없이 감각적인 문체로 그려내면서 함씨는 열정이 사라져버린 우리 삶의 조건을 섬뜩하고 집요하게 탐문하고 있다.
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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