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어, 저러다 또 대마가 잡히겠네."2일 오후 한국기원 4층 검토실. 폐쇄회로 TV를 통해 제35기 패왕전 결승 대국(조훈현 9단 대 이창호 9단)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흑을 쥐고 유리하게 판세를 이끌어가던 이 9단이 중요한 승부처에서 엉뚱하게 헛발을 디딘 것이다. 평소 스타일대로 안전하게 실리를 도모한다면 무난한 끝내기 승부. 하지만 이 9단은 집이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무리하게 백진을 공격하다 거꾸로 위험을 자초했다. 결국 금싸라기 같은 흑 대마를 헌납하며 148수 만에 불계패.
제5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 1, 2국에서 '불패소년'이세돌 3단에게 연타를 얻어맞은 지 불과 사흘 만에 다시 한 번 KO 펀치를 맞은 것이다. 연속 패배의 충격 탓인지 복기도 하는 둥 마는 둥. 평소 '돌부처'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었던 그의 얼굴에도 이날 복기 시간만큼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9단이 조용히 자리를 뜨자 토끼띠 동갑내기인 '차세대 선두주자'최명훈 7단은 "안 그래도 유리한 바둑이었는데 도대체 왜 무리를 했는지 모르겠네."하며 연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창호 왕국'에 연초부터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바둑계 안팎에서 심지어 "이창호가 축(逐)도 구분 못한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할 만큼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졸전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이 9단의 올해 전적은 8승 8패. 조훈현 9단에게 무려 10집반을 지고도 계가까지 간 제35기 패왕전 본선19국(1월 9일)을 포함해 사실상 8패 모두 '불계패'이다. 그것도 중반 이후 터무니 없는 수읽기 착오로 돌을 던진 것이 태반이다. 제4회 잉씨(應氏)배 결승 3국에서 중국 창하오(常昊) 9단에게 질 때도 다 살아 있는 대마를 어이없이 뺏겼고, LG배기왕전에서 후배 이세돌한테 이틀 연속 무릎을 꿇을 때도 '초보자도 알만 한'(서봉수 9단) 사활의 착각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게다가 올들어 승리한 대국 중에는 이 9단의 전매 특허인 '반집승'이 단 한 차례도 없다. 그만큼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계산력과 끝내기, 황소 힘줄 같은 끈기와 인내력이 그의 바둑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과연 이창호의 천재성 역시 생명력을 다하고 있는 것인가. 프로기사들의 반응은 아직은 이 9단에 호의적이다. '야생마'서봉수 9단은 이 9단의 부진을 '일시적 피로현상'으로 진단한다. "워낙 빽빽한 대국일정에 쫓기다 보면 바둑판 보기조차 싫을 때도 있다.
천하의 이창호에게도 잠시 그런 권태기가 온 것뿐이다. 의욕이 없는데 성적이 좋을 리 있겠는가. 실력이 아니라 정신 자세의 문제이기 때문에 마음만 고쳐 먹으면 당장이라도 제 페이스를 회복할 것이다. 무엇보다 나이(26세)가 어리지 않은가."'바둑황제'조훈현 9단은 "비록 LG배에서 후배인 이세돌에게 2패를 안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돈을 걸라면 이창호에게 걸겠다"며 한 술 더 뜬다. 최근의 난조에 대해 결코 섣부른 우려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견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이창호의 철옹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태위태해 보인다. 무엇보다 이창호 자신이 집대성한 수비 이론과 끝내기 기술의 평준화로 더 이상 과거 같은 스타일로는 권좌를 지키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돌부처'의 10년 아성이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하다.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