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3월 3일 독립운동가 김동삼이 서울 마포 형무소에서 옥사했다.향년 59세. 그는 1931년 만주사변의 와중에 하얼빈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돼 서울로 송환된 뒤,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이었다.
김동삼의 호는 일송이고 본명은 긍식이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고향에서 한학자로서 젊은이들을 가르치다가 한일 합방 뒤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시영 이동녕등과 함께 뒷날 신흥 무관학교로 발전할 신흥 강습소를 세웠고, 18년에는 지린성 왕칭현에서 서일 신팔균 김좌진 등과 함께 독립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듬해 본국에서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김동삼은 이에 호응해 동지들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의 총사령부로서 군정부를 조직했다.
군정부는 그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휘하에 들어가 서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김동삼은 이때 그 참모장에 취임해다.
서로군정서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신흥학교를 무관학교로 개편해서 독립군 간부를 길러내는 것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20년 8월에 2천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해 2천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해 독립군 양성의 중추적 역할을 해냈다.
23년 베이징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한 김동삼은 의장으로 선출돼 회의를 이끌었고, 그 뒤 분산된 독립운동 단체들을 일원화하기 위해 애썼다.
25년 지린성 화덴현에서 여러 독립 운동 단체들을 망라해 정의부가 조직되자 김도삼은 이 단체의 참모장 겸 행정위원이 되었고, 27년에는 김좌진.지청천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조직해서 위원장이 되었다.
김동삼이 늘 마음에 둔 것은 민족해방운동 내부의 일치와 단결이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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