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은 너무 평화적이어서 솔직히 안타깝지만 민족의 자존심을 살린 장거였다. 이름 없는 민초들 중심의 저항운동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이처럼 우리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것은 소수의 지배계층보다는 오히려 3ㆍ1 만세운동 참가자와 같은 민중들이었다.
다만 이들이 한번도 우리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한 것이 비극이라고 할 것이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갈등원인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는 내년에 실시될 대통령 선거에서 "메인 스트림들이 현 정권을 심판해 새로운 정권을 만들어 주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 총재가 말하는 메인 스트림, 즉 주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보수적 엘리트계층이나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득권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렇지만 이 발언은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을 지냈던 알렉산더 해밀턴의 다음과 같은 말을 연상하게 한다. "모든 사회는 소수집단과 다수집단으로 나뉘어진다.
소수집단은 부자와 명문가 출신들이며 다수집단은 민중들이다. 그러므로 최상층 계급에게 명확하고도 영속적인 정부 내에서의 역할을 부여하도록 하라."
우리 사회는 해방이후 지금까지 일정한 지배계층이 존재하였다. 해방이후에는 친일파나 친미파, 5ㆍ16쿠데타 이후에는 군부의 파워 엘리트들과 특정지역의 정치인, 재벌 등등이 그 면면이었다.
이제 조금 상황이 바뀌어 엘리트 중심의 정치가 아니라 다수의 의사를 중심으로 하면서 동시에 다양성을 추구하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나아가려는 단계이다.
이러한 국면에서 등장한 주류론은 혹시 위협받는다고 생각하는 기득권층의 이익수호를 염두에 둔 표현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또한 다양한 이해관계의 충돌로 인하여 우리 사회의 법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인식에서 권위주의에 대한 유혹을 고백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 동안 우리 사회를 이끌어 온 주류는 정확하게 말하면 국민의 내면의식에 대한 영향력이 아니라 정치권력을 많이 가진 계층이었다.
문제는 정치권력의 획득과정에서 작용한 힘이 정통성을 갖추지 못한 데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시민 민주주의의 본래적 이념과는 거리가 먼 권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 위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상상력이 풍부한 아웃사이더적 인간이 필요하다.
또한 민주주의를 지키고 건강하게 하기 위한 비판세력의 존재는 주류의 눈에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지겠지만 언제나 소금과 같이 소중하다. 그러나 이들이 사회의 주류세력은 아닐 것이다.
만일 주류론이 정권획득에 도움이 되는 특정계층을 의미한다면 이는 약자와 강자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강자의 편에 서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통합적이 아니라 분열적이며, 엘리트주의적 선민의식이 깔려있어서 관용보다는 배타적이다.
다양한 소수를 존중하는 민주적인 사고가 아니라 권위적 사고의 발현이며, 개성을 중시하기보다 집단주의적 국가지배의 논리와 연결된다. 시민의식보다는 패거리 의식의 표현이며, 개혁과 거리가 먼 보수단결의 구호이다.
세계화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속에서 소외계층은 계속 확대되고, 이들의 문제가 국제적 양상을 띠고 있는 지금 주류세력이 이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주장은 시대상황과는 맞지 않는다.
오히려 주류중심의 사회와 대칭되는 비주류와의 갈등을 해소하는 정치, 주류가 되지 못한 '잉여인간'들이 무시되지 않는 사회가 우리가 만들어 나아가야 할 정치적 지향점이 아닐까. 정치가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면 언제나 강자를 보호하는 정치에 빠질 위험에 처한다.
박상기 연세대 법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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