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이면 온 집안이 부산해진다. 아버지는 아랫채의 뒷뜰 한켠에 차곡차곡 쌓아둔 장작 한움큼을 안고 쇠죽을 쑤러 외양간으로 가신다.그 사이 나와 동생은 입씨름을 한다. 누가 고구마를 구울 것인가를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와 동생은 세살 터울이었지만 동생녀석이 쉽게 지려고 하지 않았기에 항상 옥신각신 한다.
하지만 굽는 일은 항상 동생 몫으로 돌아간다.
아버지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지붕 뒤 굴뚝에는 몽실몽실 연기가 피어 오른다. 한참 뒤에 아버지가 쇠죽을 퍼주고 마실을 나가시면 동생은 골라 놓은 고구마를 안고 잽싸게 아랫채로 달려가 아궁이 속에 고구마를 묻고 온다.
그리고 저녁을 먹은 후 동생 녀석은 졸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내게 말한다. "형아, 고구마 다 먹으면 안돼. 남겨 놔"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잠이 든다.
조금 뒤 나는 고구마를 꺼내와서, 동생에게 미안해 하면서 식구들과 둘러 앉아 맛있게 먹는다. 이 때 손과 입주위는 새까맣게 되고, 고구마는 약간의 재가 묻어 있어야 제 맛이 난다. 거기에 겨우내 익힌 물김치와 신김치가 곁들어 지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이것은 내 어릴 적 이맘때의 풍경이다. 오래된 것도 아니다. 불과 십수년전의 얘기니 말이다.
이러한 기억을 문뜩 떠올리면 괜스레 혼자 웃게 된다. 하지만, 이런 추억들은 앞으로 경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추억 속에서만 꺼내 볼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혹시 아이디어가 좋은 사업가가 관광테마상품으로 내놓으면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누가 뒤쫓지 않는데도 변해야 한다면서 변화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그런 속도에 짓눌려 소중했던 것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
어느 시인이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군고구마, 아궁이 장작불, 아웅다웅하던 동생, 고구마를 놓고 둘러 앉은 가족, 이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8할의 바람'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에게는 이와 같이 정이 깃든 8할의 바람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요즘 아이들 곁에는 인터넷, DDR, 게임기, 킥보드 등이 있지만 그것들 어디에도 인간의 숨결이 깃들만한 곳은 없다.
자살ㆍ폭탄사이트, 왕따 등 아이들의 정신을 갉아 먹는 균을 박멸할 수 있는 약은 '사람 냄새' 밖에 없다. 아이들에게 그런 공간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박정선 광주 동구 지산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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