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세계경제의 화두는 단연코 '일본을 배우자'였다. 도요타(豊田)자동차의 경영방식을 이름따서 '도요티즘'이 경제학과 경영학의 신용어가 될 정도였다.그러더니 불과 10여년만에 일본형 종신고용과 금융관행은 낙후한 '아시아적 가치'의 일종으로 치부되고 이제는 다시 '미국을 배우자'는 것이 세계의 화두가 되었다. 과연 10여년 후에도 여전히 세계는 미국을 배우자고 하고 있을까.
며칠 전 터키의 화폐가치 폭락이 다른 나라로 번질까 다들 전전긍긍이라고 한다. 참으로 80년대 이후 세계경제를 특징짓는 키워드는 '금융불안정'일듯 싶다.
요즘은 '월가가 재채기하면 아시아가 독감 걸리는 상황'에서 '방콕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면 월가에 폭풍이 이는 상황'으로까지 세계경제가 동조화했다.
이런 연결고리 속에서 세계경제의 불안정이 구조적인 것임은 조금만 생각을 해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알다시피 세계 주요 선진국의 연 평균 경제성장률은 3% 안팎이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금융탈규제가 유행하면서 세계적 규모의 인수합병(M&A) 바람 속에 미국을 중심으로 초대형 은행들이 생겨나고 이들의 작동은 점점 더 불투명해지고 통제난망이 되어가고 있다.
월가를 비롯한 세계의 금융자산 소유자들은 실물부문의 성장능력에 관계없이 단기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자유로운 자금이동을 보장하라고 각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경제성장률이 3% 내외인 상황에서 어떻게 이들이 기대하는 10% 안팎의 단기고수익이 실현될 것인가. 그러니 헤지펀드를 이용한 환투기며 각종 금융 파생상품이 범람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얼핏 무소불위인 투기자본들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닥칠 때에는 금융자산을 달러나 마르크 등 강력한 국가권력이 그 최종권위를 지켜주는 특정 국가의 화폐로 바꾼다는 점이다. 그들의 금융자산가치를 보장해 줄 세계정부도 세계화폐도 아직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세계화시대에도 개인과 사회의 번영을 지켜낼 가능성은 각국 정부로부터 시작된다는 이야기다.
무소불위의 초국적자본도 궁극적으로는 각국 정부의 정책을 따라 이동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정부가 외국 투기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부인가, 일부 재벌집단이나 유한 자산가집단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부인가, 혹은 대다수 일하는 국민의 번영을 대변하는 정부인가에 따라 행보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정부를 만들고 그 정부가 어떤 정책을 펼치게 할 것인가는 결국 그 나라 국민의 역량에 달려있다.
특히 한국처럼 자원이 빈약한 소국일수록 해외변수에 쉬이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내수기반이 중요하다.
또 문호를 열어 세계로부터 배우되 스스로의 통제능력에 비례하여 자본이며 기술이며 외국의 것을 들여와야 그들에게 휩쓸리는 일이 없게 된다.
국민의 역량이란 바로 그런 통제력을 내포하는 것일 터이다. 그런 통제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유능한 정부와 전문경영자, 그리고 또 있다.
국내외 투기자본이 단기 고수익논리로 자신의 생활기반을 짓밟지 않게 자신의 권익을 지킬 줄 아는 훈련된 다수 노동자가 바로 그들이다.
현 정부의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50년만의 정권교체는 어떻든 우리 모두가 이룩해 낸 현대사의 진일보였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3년, 구조조정의 성과는 정리해고 숫자 뿐 '국민없는 정부'가 되어버렸다는 비판이 뼈아프다.
노동자가 허약해지면 정부는 누구의 정부가 될까. 국민적 역량을 동원하기 위해 그들이 개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그리하여 참여하되 책임지는 훈련, 그리고 그 책임에 따라 고통을 분담하는 시스템의 마련, 더 늦기 전에 이런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 50년만에 교체된 정권이 다음 정권으로 역사의 줄기를 이어주는 길이 아닐까.
김윤자ㆍ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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