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너 내 딸 맞아?" "엄마."3차 이산가족 방북단으로 참여한 이후덕(77ㆍ서울 노원구) 할머니가 1969년 12월11일 대한항공 승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납북된 딸 성경희(55)씨를 만났다. 32년만이다.
이 할머니는 단체상봉이 진행된 26일 오후 평양 고려호텔에서 딸 경희씨와 사위 임영일(58), 손녀 임소영(26), 손자 임성혁(24)씨를 만났다.
이 할머니는 상봉장에서 어머니를 발견하고 몇 걸음 다가오는 딸을 쳐다보고도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어 성씨가 낮은 목소리로 '엄마'를 몇 번 부르자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서울을 떠나오기 전 울지 않겠다고 그렇게 약속했었건만 허사였다. "난 이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어머니야.
전에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줄 알았는데. 아니야." 이 할머니는 27일 개별상봉 때 조촐한 생일잔치를 열 생각이다. 음력 2월12일(양력 3월6일)이 77회 생일. 서울에서 케?掠沮? 준비해 왔다.
성씨는 납북되기 전날 제주도를 다녀와 비번이었는데 창덕여고 동창인 정경숙(당시 승무원)씨가 "같이 강릉에 가자"고 해 근무를 바꿔 따라 나섰다. 이 할머니는 "제주도에 가면 내일 쉬니까 일찍 돌아오라"라고 했다. 다음날 대한항공에서 납북 소식을 전해왔다.
이화여대 사회생활과를 나와 1968년 대한항공에 입사,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딸이었다. 글쓰기를 좋아해 함께 수필집을 내자고 약속하는 등 친구 같은 딸이었다.
2남 2녀 동생들도 유난히 잘 챙겼다. 납북 소식에 미친 듯이 길거리를 헤매기를 여러 번, 당시 억류된 11명(승무원 4명과 승객 7명)의 가족들이 '납북 KAL기 미귀환자 11인 가족회'를 구성해 귀환촉구 운동을 벌였으나 소식조차 닿지 않았다.
전매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성씨의 아버지 성충영씨도 납북자 가족회 활동을 벌이다 1979년 세상을 떠났다. 상봉장에서 모녀는 아버지 얘기를 나누다 더욱 크게 울었다.
다른 자식들이 결혼하거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딸 몫으로 장만한 이불이 장롱 한 칸을 가득 채우고 있다. 딸의 소식을 안 것은 1992년. 당시 자수한 간첩 오길남씨의 부인이 북에서 딸과 함께 지냈던 인연으로 소식을 전해왔다. 김일성종합대 교수와 결혼했고, 대남방송인 '구국의 소리'에서 일한다고 했다.
결혼 소식에 사위에게는 반지와 시계, 손자 손녀들에게는 내의와 스웨터를 선물로 준비했다.
딸에게는 아버지가 30년 전 사 둔 시계, 목걸이, 그리고 손수 뜬 숄, 코트 등을 준비했다. 공들여 준비한 선물은 앨범과 편지. 딸의 중ㆍ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정리해 보니 앨범으로 3권이었다. 남쪽에 있는 남동생 4명 조카 10명도 같이 편지를 썼다.
/평양=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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