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2월26일 조선 왕조와 일본 사이에 수호조약(修好條約)이 체결됐다. 그 해가 병자년(丙子年)이어서 이 조일(朝日)수호조약을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부르고, 조약이 체결된 곳이 강화(江華)여서 강화도 조약이라고 부른다.강화도 조약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존재했던 동아시아 특유의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교린(交隣)관계를 국제법에 터잡은 근대적 외교관계로 대치했다.
그러나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ㆍ식민주의를 뒷받침한 가장 힘센 무기가 함포(艦砲)와 국제법이었던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일본이 함포와 국제법을 무기로 조선에 강요한 이 불평등조약은 결과적으로 조선이 식민지의 길로 들어서는 첫 걸음이 됐다.
조약은 제1조에서 조선이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일본이 이 조항을 삽입한 것은 조선에서 청(淸)의 종주권을 배제함으로써 조선 침략의 길을 고르기 위한 것이었다.
나머지 조항들은 부산을 포함한 3개 항구의 개항과 조계(租界)에서의 치외법권에 관한 것이었다. 이로써 강화는 다시 한번 한국사의 슬픈 순간을 감당하게 됐다.
강화에서 바라본 한국사는 슬프다. 그 곳은 몽골군의 침공으로 개경을 버린 고려의 무신 정권이 새 왕도(王都)로 삼았던 곳이고, 청의 침입을 피해 조선의 인조가 몸을 숨겼던 곳이다. 천연기념물 제78호인 강화 갑곶리의 탱자나무는 그 슬픈 역사의 상징이다.
조선조 말기의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운요호(雲揚號)사건 등 강화가 개입된 한국사 연표의 항목들은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가는 신호들이었다.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 포내리와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를 잊는 강화대교는 차로 3분이면 건느지만, 그 대교 너머의 땅은 오래도록 한국사의 첨단을 껴안아 왔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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