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로 잡은 붕어 최대어는? 충남 아산 송악지에서 나온 64㎝. 웬만한 낚시꾼이라면 이 정도는 안다. 잉어 최대어는?의암호에서 나온 111㎝. 골수꾼들은 기억할 만 하다. 그렇다면 쏘가리 최대어는? 이 정도 되면 거의 아는 사람이 없다. 지난해 남한강에서 잡힌 63.5㎝이다.
낚시잡지 낚시춘추(㈜다락원 발행)가 창간 30주년을 맞아 특집호를 내면서 한국 낚시의 역사와 기록을 두루 정리한 특별부록을 냈다.
제목은 '한국낚시 55년, 300대 뉴스ㆍ사건'이다. 168쪽의 이 부록에는 낚시장비의 변천사, 미끼와 채비의 변화, 최대어 갱신 드라마, 낚시문화의 변화 등이 12개의 장으로 나뉘어 수록돼 있다.
우리 현대 낚시 역사의 첫 정리 작업인 셈이다.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산길과 농로를 걸어서 고생 끝에 낚시터에 도착했던 연륜이 깊은 낚시꾼은 물론, 우리 낚시의 옛모습을 모르는 초보들이 필독할 만 하다.
편집자들은 우리의 현대 낚시문화가 1946년 4월1일 서울낚시회가 창립되면서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 이후 1948년 서울어구상조합이 후원하는 서울시민 낚시대회가 처음 열려 낚시 대중화의 길을 연 것으로 해석한다.
가장 인기있는 민물미끼인 떡밥이 상품화한 것은 1960년대 초반. 그 이전에는 낚시점에서 각자 만들어 됫박으로 팔았다.
'주작'이라는 이름의 이 떡밥은 원래 낚시용 떡밥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곡류를 분말형태로 갈아 만든 환자 보조용 식품이었다.
전남 순천의 한 상인이 수입한 이 분말을 조구상 오장규씨(현 새서울낚시 대표)가 인수해 유통시켰다.
이후 신한, 토끼표, 거북이떡밥이 등장했는데 이 세 제품은 모두 같은 방앗간에서 만들어 봉투만 달리해 판매한 같은 제품이었다.
조행길의 혁명으로 불리는 것은 1982년 12월에 단행된 심야 통행금지 해제. 버스 속에서 잠을 자고 새벽낚시를 시작하는 무박1일 낚시의 시대를 열었고, 전국의 저수지가 1일 낚시권이 됐다.
자연스럽게 낚시계의 활황을 몰고 왔다. 길목 좋은 곳에 위치한 낚시점들은 24시간 영업에 돌입했다. 한남동 낚시타운도 이때부터 불야성을 이루었다.
1948년 국내 최초의 낚시대회였던 서울시민낚시대회는 김포 하성수로에서 벌어졌다. 당시 450명의 낚시꾼이 트럭 14대에 나눠타고 낚시터로 향했다. 트럭 한 대에 평균 32명. 짐짝처럼 실렸을 낚시꾼과 장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1955년 7월 서울낚시회주최의 제1회 전국낚시대회가 김포 대명수로에서 열리면서 전국 규모의 낚시대회가 시작됐다.
낚시 대중화를 이끈 주체는 다름 아닌 신문사. 특히 한국일보사는 1956년 10월4일 수원 원천지에서 제1회 전국낚시선수권대회를 열고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낚시 대중화에 불을 지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우승자에게 상패를 내리는 등 정부에서도 낚시를 건전 여가로 규정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눈길을 잡는 것은 역시 옛 낚시꾼들의 사진. 웅덩이에 빠진 버스를 꺼내기 위해 낚시꾼 모두가 달려들어 차를 미는 모습, 낚시터 한 쪽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가족의 밥을 짓는 아낙네들, 도끼로 얼음을 깨던 옛 얼음낚시 등 고생스러웠던 것 만큼 더욱 즐거웠던 그 때의 정겨웠던 그림을 담고 있다.
권오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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