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의 시인 정지용(鄭芝溶)은 40년 가까이 월북시인이었다. 지금 국민시인처럼 사랑 받는 그의 이름이 출판물에 정0용 식으로 표기돼 온 것은 우리 현대사의 유별난 레드 콤플렉스가 빚어낸 희화였다.그의 이름이 되살아 난 것은 유가족과 문단 사람들이 오래 애쓴 결실이다. "자진월북이 아니라 6ㆍ25 직후 인민군에게 납북됐으니 이제는 월북자 가족이라는 천형을 면하게 해달라"는 호소가 받아들여진 것이 1988년이었다.
■아버지의 행방을 알려달라는 맏아들(구관ㆍ求寬ㆍ73)의 탄원에 군 당국은 83년 납북으로 추정된다고 통보했다.
인민군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갔고, 그 후 평양감옥으로 이감됐다가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군 당국의 결론이었다.
가족들도 며칠간 수소문 끝에 시인의 소재지가 서대문형무소임을 확인했었다. 이를 근거로 유족이 해금 청원을 했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였으니 납북사실을 공식 인정한 셈이다.
■정지용 시인이 종적을 감춘 것은 인민군 치하이던 1950년 7월 말이었다. 이화여전 교수로 일하다 칩거생활을 하던 녹번리(서울 녹번동) 초당에 4~5명의 후배 문인이 들이 닥친다.
숨어 지내면 오해를 받게 되니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자수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러 온 것이다. 잠깐 다녀오겠다며 그들을 따라 나간 시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배재중 학생이던 둘째 아들(구인ㆍ求寅ㆍ67)도 아버지를 찾아 헤매다 돌아오지 못한다.
■9ㆍ28 수복 때 북에 끌려간 시인은 유엔군의 폭격을 피해 평양형무소 죄수를 분산수용하는 혼란 속에 탈출한 계광순(桂光淳ㆍ전 국회의원ㆍ 90년 작고)씨에게 목격된 것이 최후였다.
아버지를 찾다가 북으로 간 둘째 아들이 26일 3차 이산가족 상봉 때 형과 여동생을 만난다. 그는 찾는 사람 란 첫 칸에 아버지 이름을 적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처참히 죽었을 아버지가 남쪽에 살아 있기를 바라는 생이별의 비극이다. 북한은 민족시인의 최후를 확인하는데 협조할 의무가 있다.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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