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미당 서정주, 운보 김기창 등 우리 문화계의 거목들이 차례로 세상을 떴다. 평소 문학과 미술을 그다지 가까이 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이 남긴 족적이 너무 뚜렷해 갑자기 마음이 허전해 짐을 느꼈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그런데 이들이 가진 공통적인 의문이 있다. 미당과 운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친일 행각 때문이다.
■윤치호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1865년에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개화운동에 투신, 1881년 신사유람단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후 미국에 건너가 신학문을 배웠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 비준 때 미국 공사의 통역관으로 귀국해 다음해 갑신정변에 가담했다. 그 후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했고, 1911년에는 105인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일제 말기에 변절, 귀족원 의원을 지냈고 해방 후 친일파로 규탄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울대 박사과정에 있는 김상태씨가 최근 출판한 '윤치호 일기'는 윤치호가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쓴 영어일기 중 1916년부터 1943년까지의 내용을 요약했다.
김씨는 이 책에서 "중일전쟁 발발 전까지 확실한 친일파도 아니면서 독립운동 무용론을 고수한 회색인으로서의 독특한 내면세계, 아니 어쩌면 일제시기 조선인들의 보편적인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고 썼다.
■김씨는 "'물 수 없으면 짓지도 말라'는 좌우명처럼 무질서하고 파당적인 민족성에 대한 한탄 등에서 비롯한 양비론적 사고는 결국 그가 친일의 나락에 빠지는 요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윤치호가 왜 친일파가 되었느냐에 대한 분석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끊이지 않는 망언 등이 다시 우리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미당 운보의 타계는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제는 그 시대의 '아킬레스 건'인 친일파 문제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해석과 비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 이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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