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삶에 '안개를 피우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루하루 쫓기듯 틀에 박힌 건조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를, 어떤 소설은 서서히 모호하고 습한 안개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 속에서 그냥 길을 잃고도 싶다.은희경씨의 장편 '그것은 꿈이었을까'는 우선 안개의 소설이다. '호수와 강이 가까워서인지 도시는 밤이 되면 곧잘 안개로 뒤덮인다. 늦은 밤 무심히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가 검은 창 바깥의 자욱한 안개에 불현듯 놀랄 때도 있다. 세상은 온통 안개 천지이다. 뿌옇게 감싸인 아파트 숲과 밤거리가 어찌 보면 저주와 재앙의 도시 같은가 하면 신비한 신생(新生)의 의식이 치러지는 신전 같기도 하다.'
은씨는 자신이 '그것은 꿈이었을까'에서 이렇게 묘사한 안개의 신도시인 경기 일산에 산다.
소설의 주인공 의대생 준은 이야기의 말미에 결혼해서 이 도시에서 살고 있다. 그는 이런 신도시에 사는 평균 혹은 그 이상의 계층 사람들처럼 갖출 것을 갖추고 살아간다. 아내와 다섯 살 난 아들, 약간의 저축과 콘도미니엄 회원권, 통신 판매로 산 실내 운동기구 따위의 꼭 가질 필요는 없는 자질구레한 물건들, 규칙적 동반 외출, 기념일마다 선물을 주고 받는 습관 등.
소설의 내용을 거꾸로 거슬러 가는 셈이지만, 준은 그러나 이렇게 살아가기 전에 어떤 지독한 상실, 우주의 블랙홀에 빠져드는 듯한 젊음의 한 시기를 통과했다. 지금 획득한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어 보였던 의대생이었던 시절, 그는 '꿈'을 꾼 것이다.
일산에 여럿 들어선 대형 쇼핑센터에서 가까운 은씨의 작업실에 준이 꾼 꿈의 모티프가 된 그림이 여전히 걸려있었다. 에곤 실레라는 화가의 '왼쪽 다리를 세우고 앉은 초록 옷의 여자'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이 실려있는 실레의 화집과 하드 커버로 된 카프카의 소설 '성', 그리고 비틀스를 좋아하는 같은 의대생인 친구 진은 준이 아무 것도 특별하게 여길 것 없는 자신의 인생에서 유독 특별하게 여기는 세 가지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소설가 장정일은 '아담이 눈뜰 때'에서 아담이 원했던 세 가지를 뭉크 화집과 턴테이블, 타자기라고 했었다. 10년이 지나는 동안 은씨의 소설 주인공이 원하는 세 가지는 이렇게 변했다. 그러나 사실 달라진 것은 없지 않은가? 젊음이 앓는 상실, 그들이 꾸는 꿈은 시대가 달라져도 변함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은씨의 안개는 '무진기행'의 김승옥의 안개이기도 하고, 준이 원했던 '세 가지'는 장정일의 '아담'이 갖고자 했던 것들이기도 하다.
준은 이 세 가지를 통해 안개 속에서 갑자기 길을 잃어버리듯 인생의 낯선 지점으로 빨려 들어간다.
"꿈은 인생의 다른 버전(version)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은씨는 일부러 '인생은 꿈이었을까'를 모호한 분위기의 소설로 썼다고 말했다. 사실 날선 칼처럼 세상의 폭력에 대해 위악과 냉소의 포즈를 취하던 은씨의 작품 경향은 이 소설에 와서 180도라 해도 좋을 정도로 달라졌다.
"일산의 안개를 좇아 한밤이든 새벽이든 차를 몰고 출정(出征)하곤 하면 마치 안개 속을 헤매듯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이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 되어버리는 듯한 경험을 하곤 했습니다. 주인공 준이 꾸는 악몽 같은 꿈도 실제 많이 꾸는 편이지요." 은씨는 "인생이 모호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문학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그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준이 스스로를 '마리아' 혹은 '미리암'이라고 부르는, 실레의 그림을 닮은 초록옷을 입은 여자를 만난 고시원 '레인 캐슬'은 2년여 전 은씨가 장편소설 '새의 선물'을 쓰기 위해 보름여 체류했던 가야산의 고시원을 무대로 한 것이다. '불은 항상 켜져 있습니다' '수련 중 체험하게 되는 현상은 수련의 과정이니 당황하지 말고 정진하십시오'라는, 마치 비밀 집단의 강령 같은 소설 속 문구도 그대로였다고 한다. '스노랜드'에서 간판의 '스' 자가 떨어져 나가버려, 아무것도 아닌 땅이라는 뜻의 '노랜드'가 되버린 위락시설이 있던 설천은 전북 무주에 실재하는 지역이다.
준이 마리아를 만난 뒤 수련의 생활을 그만 두고 프라하로 떠나기 전 혼자 살았던 복합건물은 소방서였고, 길 건너편의 주유소가 있는 피자집 건물은 일산 신시가지의 6차선 도로 옆 한적한 뒷길에 실제로 서 있다. "동료 소설가 배수아씨가 바로 그 피자집 이층에 살았었다"고 은씨는 귀띔했다. 일산에는 많은 문인들이 산다. 은씨와 배수아 이순원 윤대녕 김인숙씨 등 문단에서는 '일산파'라 불릴 정도의 일군의 젊은 소설가들의 서식처가 돼 있는 곳이 일산이기도 하다.
'K가 도착한 것은 밤이 깊어진 뒤였다. 마을은 눈 속에 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와 어둠 속에서 성을 비춰주는 불빛조차도 알아볼 수 없었다.'
카프카의 소설 '성'의 첫 부분은 '그것이 꿈이었을까'에서 계속 변주되는 또 하나의 모티프다. 주인공 준과 진은 '무슨 강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함께 외우며 술을 마셨었다.' 이들에게 앞으로의 삶은 눈과 안개와 어둠에 덮인 '성'처럼 불안하고 모호한 무엇이었을 것이다. 목표지점이 명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은 채, 다만 그것에 도달하려 하는 과정이 우리의 삶이다. 은씨는 그것을 소설 속에서 이렇게 풀어 썼다.
'나는 삶이 사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삶에는 모호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 나는 건조하고 명백한 사실 속에서만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처럼 불완전하고 애매한 존재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방식인 모양이다.'
은씨는 "나는,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에는 세상은 이러저러하다고 반듯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 반듯함이 세상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소설을 쓴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 소설의 위악은 삶의 그 허상을 걷기 위한 방법"이라고 부언했다.
프라하 여행에서 돌아온 준은 교통사고로 죽은 친구 진의 약혼녀와 결혼하는 것으로 소설은 되어있다. 적당한 양을 적당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먹어서 체중을 유지하는 일에 신경쓰는 아내, 그리고 준 자신은 "몸에서 힘을 빼, 혼자 뻣뻣한 놈 치고 장타 날리는 놈 못 봤다"며 골프를 가르쳐주며 젊은 캐디와 언제부터인지 같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선배와 함께 일상을 보낸다. 선배와 같은 속인이 되어갈 준도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다. 무서운 꿈을 꾸었다며 놀라는 아이에게 아내는 "너도 곧 어른이 되면 무서운 꿈을 안 꾸게 돼. 다 크느라고 그런 거야"라고 말해준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휴일에 아내와 신도시 가운데 있는 작은 산, 일산의 정발산공원에 올라간 준은 도시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꿈을 꾸지 않게 되면 떨어질 곳도 날아오를 곳도 없어진다. 누군가는 위에서 걷고 또 누군가는 아래에서 걷겠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반복되는 시간의 평지를 걷는다는 점은 다 마찬가지다. 그렇게 걷다 보면 죽음과 만난다."
/글= 하종오기자 joha@hk.co.kr 사진= 홍인기 기자
■'그것은 꿈이었을까'/ 줄거리
의대 수련의인 나(준)와 진은 쌍둥이 같은 친구 사이다. '이 시각 어디선가 많은 일이 일어나긴 하겠지만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내 인생도 마찬가지다'라고 생각하는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세 가지 뿐이다. 에곤 실레의 화집과 카프카의 소설 '성', 그리고 비틀스를 좋아하는 친구 진 정도.
나와 진은 어느날 의사고시 준비를 위해 '레인 캐슬'이라는 한 지방 고시원으로 떠난다.
그곳은 진이 컴퓨터통신에서 '노웨어맨'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이로부터 소개받은 곳이었다. 레인 캐슬에서 나와 진은 꿈결처럼 한 여자를 만난다. 실레의 '이중 자화상' 그림처럼, 마치 살아있는 내 영혼 같은 느낌을 주는 그 여자로 인해, 나는 실체를 알 수 없는 꿈에 시달린다.
내가 안과 수련의로 일하던 병원으로 여자가 다시 찾아오고 꿈 속에서 그녀로부터 도망치듯 이별한 나는 수련의를 그만 두고 혼자 무심히 지내다 '성'의 도시 프라하로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미나와 미아라는 레즈비언은 나를 레인 캐슬에서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프라하에서 돌아온 다음날 나는 약혼식을 앞두고 진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3년 후, 나는 안개가 많이 끼는 신도시에서 진의 약혼녀였던 아내와 살고 있다.
신도시의 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양지마을은 고시원 '레인 캐슬'이 있던 마을 이름과 같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지만 내 아이는 무서운 꿈을 많이 꾸는 모양이다. 나는 삶이 명백한 사실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꿈은 이제 나를 빠져나가 어딘가에서 제 나름의 날갯짓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약력
▦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 숙명여대(1981)ㆍ연세대 대학원 국문과(1983) 졸업 ▦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이중주' 당선 ▦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1996)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1999) 장편소설 '새의 선물'(1995)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98) '그것은 꿈이었을까'(1999) ▦ 문학동네소설상(1995) 동서문학상(1997) 이상문학상(1998) 한국소설문학상(2000) 수상
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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