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소설가 김영하(33)씨가 새 장편 '아랑은 왜'(문학과지성사 발행)를 발표했다. 그간 '호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등 두 권의 단편소설집을 내면서 발표작마다 분방한 상상력과 젊은 감수성, 특유의 속도감 넘치는 문장으로 9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소설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던 그에게 거는 문단의 기대는 크다.그 가능성이 짧은 이야기(단편)가 아닌 호흡이 긴 이야기(장편)에서는 어떻게 충족될 것인가.
김씨가 데뷔작인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후 5년만에 발표한 새 장편소설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랑은 왜'는 김씨답게 뭔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는 '꾼'으로서의 기지가 엿보이는 소설이다.
소설의 기본 무대는 16세기 경상도 밀양의 아랑(阿娘)전설이다. 밀양군수 윤관의 딸아랑은 관노에게 겁탈을 당하려다 반항, 죽임을 당하고 버려진다.
아비 윤관은 아랑의 죽음에 상심해 벼슬을 버린 채 떠나고, 이후 새로 부임하는 군수들은 첫날밤에 의문의 시체로 죽어나간다.
이상사라는 신임 군수는 부임 첫날밤 나타난 아랑의 원혼으로부터 억울한 죽음의 사연을 듣고 그 한을 풀어주기로 한다. 아랑은 나비가 되어 자기를 죽인 자의 머리 위에 내려앉아 범인임을 지목해 준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아랑 전설의 줄거리지만 21세기의 작가 김씨는 450여 년 전의 이 이야기를 새로운 지적 추리의 장으로 만들어냈다.
조선왕조실록과 딱지본 '정옥낭자전' 등 아랑 전설의 여러 다른 판본에 바탕해 아랑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를 파헤치려 하는 것이다.
역사소설을 쓰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작가가 전능한 입장에서 과거의 역사를 완전한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할 수도 있고(홍명희의 '임꺽정'), '상도'의 작가 최인호씨처럼 현대의 화자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새로운 시각에서 재해석할 수도 있다.
김씨는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비켜간다. 그는 아랑 전설의 줄거리를 독자에게 제시한 뒤, 그 이야기의 허술한 틈새를 독자와 함께 메꾸어나가는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소설을 쓰는 작가가 독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새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들이 사건을 풀어나가도록 하는 일종의 지적인 추리 게임으로 자신의 소설을 만들고 있다.
또 '아랑은 왜'에는 현대의 작가이며 번역자인 박과 그의 애인 영주의 이야기가 또 하나의 구조로 등장한다.
아랑의 살해범은 다름 아닌 아비 윤관이라고 사건을 풀어나가며 흥미로운 게임처럼 쉼없이 독자를 몰고 가던 소설은, 현대의 영주의 죽음도 미궁에 빠진 뒤 박이 아랑의 귀신을 만나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독자는 책을 덮으려는 순간 작가가 제시했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정옥낭자전'이라는 문서마저도 사실은 허구라는 것을 책의 한 귀퉁이에서 읽을 것이다.
도대체 이야기의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김씨의 이번 작품의 주제는 사실 바로 이것이다. 이야기는 누가 만드는가? 누가 이야기의 주인공인가? 작가는 말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이 우리의 몸을 빌려 자신들의 유전자를 실어나른다. 그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이야기꾼의 운명이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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