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는 '눈 먼 돈'이 있다. '극영화제작지원금' 이다. 말 그대로 한국 극영화 제작을 위해 지난해부터 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사에 지원하고 있는 돈이다. 이미 두 차례 14편에 편당 최고 5억원까지, 모두 51억 2,000만원을 주었다.과거 물건(부동산)담보, 판권담보 융자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흥행으로 수익이 생기면 갚지만, 손해보면 안 갚아도 된다.
흥행에 부담없이 쓰라는 것이다. 영화가 '21세기 문화전략 상품' 이고, 한국영화가 모처럼 르네상스를 맞았는데 상업성이 약하다는 이유로 예술성 있고, 꼭 필요한 영화가 돈이 없어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다. 지원금이 '종자돈'이 돼 투자유치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작품성과 흥행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으니, 한결 쉬울 것이다.
당연히 너도나도 달려 들었다. 한 번에 70여 편이 몰려들었다. 문제는 '옥석을 어떻게 가리느냐' 였다. 결국 세번째 지원작 선정을 앞두고 최근 사단이 일어났다.
7편을 뽑은 본심(2차)에 "절차상 문제가 있다" 며 일부 영화사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자체 감사 결과 7명이어야 할 심사위원이 6명 뿐이었고, 그나마 영화진흥위원이 3명이나 들어가 형평성에 문제가 있으며, 세칙에 점수제로 선발하기로 한 것을 무시한 것이 발견됐다. 그래서 "무효화하고, 재심사를 해야 한다" 는 결론이 내려졌다.
진흥위원들 간에 갈등이 빚어졌고, 사태를 원만히 수습 못한 유길촌 위원장은 9일 사퇴서까지 냈다. 사퇴서는 문화관광부에 의해 17일 반려되었다.
출범부터 비틀거리다 지난해 1월 겨우 모양을 갖춘 영화진흥위원회가 다시 흔들거리게 됐다. 이번 사태 역시 속을 들여다보면 영화계 고질병인 신ㆍ구 갈등에서 나왔다. 나이 든 영화인들은 2차 심사에서 자신들의 작품이 대부분 탈락하자 "후배들이 다 해먹는다" 며 반발했다.
실제 과거 판권담보융자를 받고 아직 그 돈도 갚지 못한 젊은 영화인들이 다른 영화사를 통해, 아니면 감독에서 제작자로 역할을 바꾸어 지원을 받은 것에 대한 영화계의 시선이 곱지 않다.
말썽의 소지가 많은 것일수록 절차와 형식이 중요하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을 만들고,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제작조건과 현실여건을 감안한다' 는 식의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원칙은 분란만 일으킬 뿐이다. 만들지도 않은 영화를 놓고 순위를 매기는 것도 우습다. 국내ㆍ외 영화제 수상작을 낸 영화사의 차기작을 지원하는 방법도 있다.
그렇더라도 '일방적인 지원'은 문제다. 누구 돈인가. 국민의 세금이다. 영화가 문화의 특권영역은 아니다. 영진위는 20일 이번 사태와 관련, 자신들의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묘책이 나올까.
이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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