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질적인 장르의 결합 내지는 융화'를 뜻하는 '퓨전(fusion)'이 음식의 형태로 한국에 상륙한 것은 불과 2~3년 전이다.서울 강남의 청담동 일대를 중심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식 퓨전 푸드를 표방하는 레스토랑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더니 마치 들불처럼 순식간에 식당가 전역으로 퓨전 열풍이 번졌다.
주방에선 동ㆍ서양 음식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 끊임없이 시도됐고, 퓨전의 창의성과 도전정신은 요리사들의 제1 덕목으로 떠올랐다. 퓨전이 아니면 감히 명함도 못 내민다고 할 정도였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소비자들의 입맛 때문일까. 그 잘 나가던 퓨전도 요즘엔 인기가 예전 같지만 않다. '원조'에 해당하는 유명 퓨전 식당들 중에는 이미 문을 닫은 곳도 생겨났고, 생고기나 설렁탕 따위의 대중 메뉴로 아예 종목을 바꾼 곳도 적지 않다.
자연스럽게 퓨전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비판도 쏟아지고 있다.
비판의 요지는 간명하다. "국적 불명의 음식이 쇠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 한 음식 전문가는 "어느 장르에도 뿌리를 두지 못한 채 재료만 뒤섞는 작업(퓨전)이 과연 우리 식문화 발전에 무슨 기여를 할지 의구심이 든다"고 꼬집었다.
외국에서 이미 개발된 퓨전 푸드를 겉모양만 베끼는 일에만 혈안인 사람들이라면 분명 귀담아 들어야 할 충고다. 하지만 '국적 불명'이나 '주체성'까지 운운하며 퓨전 자체에 지나치게 배타적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따지고 보면 결국 음식도 문화이고, 융합과 섞임은 너무나도 자연스런 문화현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전통음식, 김치를 예로 들어보자. 김치 맛을 내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고추는 본래 멕시코가 원산지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불과 400년 전인 16세기 임진왜란 때였다. 평소 매운 맛을 좋아하던 우리 민족이 외래 음식을 우리 것에 잘 융합한 결과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의 김치가 태어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배추가 김치의 재료로 쓰이기 시작한 역사도 100년이 채 안됐다는 사실. 지금처럼 알이 희고 통통한 배추(원래는 '백채')가 중국에서 들어와 전국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902년경(윤숙자 저 '한국의 저장 발효음식')부터였다.
지극히 한국적이라고 생각했던 먹거리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예외 없이 이질적인 문화와의 섞임과 변용의 과정이 있었다. 우리가 퓨전에 대해, 특히 퓨전의 창조정신에 대해 좀 더 우호적이어야 하는 이유다.
변형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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