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ㆍ1865~1945)는 일제 말 친일파의 대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기독교계의 일본화 작업을 주도했고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지원병후원회 등 대표적인 친일단체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1941년에는 총독부의 중추원 고문직 제의를 수락했다.그러나 윤치호는 구한말과 일제 치하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거물급 지식인이기도 했다. 일본 중국 미국에서 유학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자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 회장을 지낸 개화ㆍ자강 운동가였으며, 미국 감리교 최초의 신자이자 YMCA 민족운동의 지도자였다. 이런 그에게 후세 사가들이 상반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윤치호 일기'(역사비평사 발행)는 비난과 추앙을 한 몸에 받았던 그가 남긴, 지금까지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소중한 사료이다.
식민지 시대 한 지식인이 바라본 일제의 조선 통치정책, 여러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조선의 역사와 민족성에 대한 신랄한 자아비판 등이 담겨 있다.
그는 이 일기를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직전인 1883년부터 해방 전인 1943년까지 장장 60여 년 동안 거의 매일같이 영문으로 썼다.
김상태(36ㆍ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과정)씨가 1973~1989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윤치호 일기'를 저본으로 삼아 우리 말로 옮겼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3ㆍ1운동을 반대한 이유이다. 그는 이 민족적인 거사를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파악했다.
"이번 운동에 반대하는 세 가지 이유는 이렇다. 조선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 상정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나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는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약자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강자의 호감을 사는 것이다."(1919년 3월 6일)
일제의 내선일체론을 적극 지지하는 대목에서는 섬뜩한 느낌마저 갖게 된다. "내선일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총독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말했다."
(1939년 3월 3일) 중일전쟁을 위한 병력동원책의 하나로 취해진 내선일체론을, '조선인 차별정책의 철폐'쯤으로 해석한 것은 분명히 안이한 태도였다.
중일전쟁을 '황인종 대 백인종의 전쟁'으로 간주, 일본의 승리를 바란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하지만 지금의 입장에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조선인의 민족성'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이다.
좌옹은 모든 정치적 독립운동에 반대하면서 민족성 개조만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외국인을 초청해서 한식을 대접할 때면 창피해서 낯을 붉히게 된다. 버젓한 음식점 하나 운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독립국가를 경영하길 원하니, 나 원 참 기가 막혀서."(1920년 1월 13일)
그럼에도 그는 어쩔 수 없는 이 땅의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일본인들이 매정하고 무자비한 정책을 펴면서 조선인의 생계수단을 빠르게 잠식해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기술과 자본과 시장이 없는 조선물산 장려 바자회가 무슨 수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지 안타까워 했다.
3ㆍ1운동 후 구치소에 수감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에서는 일제 경찰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밤새워 괴로워했다.
편역자 김상태씨는 이렇게 평가했다. "윤치호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끼치는 해악을 분명히 인식했으면서도, 성악설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스스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무장해제하고 만 것이다. 이런 판단 아래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입장은 현상유지, 곧 현실 순응일 수밖에 없었다."
김관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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