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안기부 예산 1,000억원 이상을 정치인들이 선거자금으로 유용한 사건이 터져나오더니만, 최근에는 대우가 41조원 규모의 분식회계를 감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10조원대의 불법대출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곧이어 동아건설도 4,700억원 규모의 분식회계를 했다고 자인하였다. 그런가 하면 8,200억원을 쏟아부은 시화호 사업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끝없이 터져나오는 비리사건을 보고 있자면 우리 사회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왜 이 모양일까. 그 원인을 밝혀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의 이념을 제시하면서, 개혁을 위한 여론 형성과 제도화를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언론의 중대한 임무라고 생각한다. 과연 한국일보는 이러한 사회적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가.
지난달 31일 국세청이 국내 언론사들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에 대한 한국일보의 반응은 '투명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혹시 '언론 길들이기'가 아닌가 하는 항간의 우려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생각해 보면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 면제는 역대 정권이 부여한 특혜이고 그 결과의 하나가 권언유착이라는 사회문제가 되어 개혁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 족벌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모 신문사는 세무조사에 대하여 결사 항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이에 비하면 한국일보의 보도태도는 전향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의 특혜 부여와 이에 따른 일부 언론의 반개혁적 보도관행이 유발한 사회적 폐해와 이를 치유하기 위한 조치의 타당성을 정면으로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개혁은 그 성과를 제도화하지 않는 한 항상 물거품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과성 개혁작업보다는 더디더라도 개혁을 제도화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
그 일환으로 근자에 요구되고 있는 것이 이른바 개혁입법이다. 2월 2일자 5면 '보안법 개정논란 쟁점' 기사를 보면 국가보안법 개정 시기 내용 방법 등에 관한 각 정당의 입장을 가감 없이 그대로 비교해서 보여주고 있다.
중립적 보도태도라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재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개의 정당이 모두 근본적으로는 보수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들의 주장만을 보도한 것은 여론의 일부만을 소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단체 등 진보세력 그리고 학계의 의견도 함께 정리해 주었다면 더욱 돋보이는 보도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국가보안법은 법률의 내용도 문제이지만 지금까지 정권안보를 위해 악용되어 왔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는 측면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점도 아쉽다.
한편 '돈세탁 방지법'과 관련한 2월 12일자(5면)의 보도는 비판과 여론 형성이라는 언론의 사회적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국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돈세탁 실태와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정확하고 단호하게 지적하고 있다.
비록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로부터 우리나라가 비협조국가로 지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재정경제부의 발표에 따른 보도이기에 수동적인 보도태도라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개혁입법의 의미를 차분하게 정리해 준 실속있는 기사이다.
전반적으로 지난 2주간의 보도는 사회 개혁에 관한 재야 시민단체의 목소리를 거의 도외시하고 있다고 보인다.
개혁은 국회의원이나 정부관료 등에 의해 위로부터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개혁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그보다는 밑에서부터의 개혁이 절실하게 필요하고 이를 선도하는 것이 언론의 책무라는 점에서 이들 제도권 밖의 여론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성천ㆍ중앙대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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