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갓 작은 이야기에 불과한 소설(小說)이 위대한 서사문학의 계보에 속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많은 부분 서술자에게 달려있다.서술자는 소설과 독자 사이를 중개하며 허구와 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러나 다리라고 해서 모두 같지는 않다. 하물며 한강다리도 보다 아름다운 다리와 그렇지 않은 다리가 있지 않은가. 소설도 그렇다.
김영하의 '크리스마스 캐럴'('현대문학' 2001년 1월호)과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동서문학' 2000년 겨울호)를 읽고 제일 먼저 든 생각도 그것이었다.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들처럼 이 두 소설을 열 자 이내로 줄여서 말하라면 다음과 같다. 옛 애인 죽인 범인 찾기(김영하)와 바보농민 죽음 전말기(성석제).
요즘은 언론에서도 자주 언급되지 않는 이 진부한 '사건'을 두 작가는 위대한 '예술'로 빚어놓았다. '작가'의 위력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소위 자유간접화법을 사용한 드라이한 문체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대사들은 모두 지문 속에 파묻혀 있으며 그나마 온전한 말이 드물다. 거의 토막난 말들이다. 이를테면, '영수는 말했다. 그만해. 뭘 그만하라는 거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글쎄, 알았으니까 그만해. 왜 그만하라는 거야? 진숙이 걔, 죽었어.
죽어?' 같은 식. 더불어 이 소설은 한 번도 행갈이를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단락 뿐이다.
이것은 일단 시각적으로 굉장히 빽빽하다는 인상을 준다. 가독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애 낳고 집 사고 주말이면 이마트에 다니'면서 늙어 가는 소시민 주인공들의 닫힌 삶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기교도 없다.
주인공들의 일상은 활자의 빽빽함에 버금간다. 과거의 그 어떤 추악함이나 미래에 관한 그 어떤 희망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
모든 것들은 철저하게 차단된다. 아니, 차단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불사한다. 그들은 다만 물샐틈없는 빽빽함을 원할 뿐이다.
김영하가 일상의 폭력성을 조형적으로 재현하고 있다면 성석제는 그 특유의 입담으로 한 바보의 지혜와 덕을 기리고 애도한다.
해학과 풍자, 촌철살인의 말장난, 생생한 구어의 묘미 등이 없었다면 황만근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동은 지금보다 훨씬 덜했을 지도 모른다. 사실 그것은 이문구의 '관촌수필' 가운데 하나인 '공산토월(空山吐月)'이나 윤영수의 '착한 사람 문성현'을 통해 이미 익숙해진 테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짬깜만'이라고 외치는 황만근의 혀짧은 목소리와 태어나 한번도 씻지 않은 그의 몸 냄새, 그리고 그와 아들이 주고받는 불효막심한 대화법 덕택에 우리는 '황만근'을 우리 시대의 짜라투스트라 목록에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혹, 김영하의 '빽빽함'이 전망이 보이지 않는 갑갑증을 유발하고 성석제의 '애도'가 대책없는 휴머니즘의 하나라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소설'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소설의 다리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아니다.
그것은 기껏 강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다 주는 그 무엇일 뿐이다. 다만 견고하고 아름다운 다리일수록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기는 한다. 이쪽과 저쪽은 다리 위에서만 동시에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그 다리 위에 서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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