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사회에서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은 극히 제한된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다.동아시아에서 그런 사람들은 흔히 유자(儒者) 또는 선비라고 불렸고, 유럽에서는 리테라티라고 불렸다. 그런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던 것은 보통교육이 확립되지 않은 데다가, 글말과 입말이 분리돼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고전 중국어 곧 한문으로 글을 쓰는 것을 뜻했고, 유럽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옛 로마시대의 문어 곧 고전 라틴어로 글을 쓴다는 것을 뜻했다. 당연히,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문맹의 늪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민족국가의 성립과 함께 자국어로 글을 쓰는 것이 당연시되고 시민혁명 이래 보통교육이 도입되면서 그런 제약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 뒤 '대중'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전통 사회에서 누렸던 독점적 지위를 위협받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집필에서 출판에 이르는 과정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 닿을 수 없는 먼 곳이다.
한편, 표현 욕구는 사람에게 본원적인 것이다. 특히 삶의 황혼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이 살았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바람은 자연스럽다. 그런 바람을 격려하는 것은 문학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
기자는 최근 기묘숙(奇苗淑)이라는 분이 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라는 문집을 읽었다. 비매품이다. 발행처가 고봉학술원(高峯學術院)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奇大升)의 후손인 듯하다.
저자는 1916년생, 그러니까 세는 나이로 86세다. 그는 6ㆍ25 한 해 전인 1949년에 남편을 잃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어렵사리 키워냈다. 중년에 이르러서는 원불교에 입교해 마음을 추슬렀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는 지나온 삶에 대한 저자의 회고와 종교적 명상으로 채워졌다. 학교 공부를 하지 않은 이의 글이어서 문체는 질박하고 단조롭다.
그러나 투박한 표지만큼이나 멋부림 없이 쓰여진 이 글들에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기묘숙이라는 개인의 삶이 묻어 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책에도 특권으로서의 글쓰기나 출판이라는 혐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글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온 저자가 책을 낼 수 있었던 데에는 전문직 종사자들로 잘 자란 자식들의 배려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가문(家門)'이라는 봉건적 에토스의 힘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글쓰기의 민주주의는 아직 미래의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글쓰기의 민주주의는 시간을 우군으로 삼고 있다.
특히 인터넷은 대중으로서의 지식인을 탄생시키며 즐김으로서의 글쓰기, 아마추어리즘으로서의 글쓰기를 격려해, 교육적ㆍ계급적ㆍ연령적 배경과 상관없이 누구나 사이버 공간과 현실 공간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글을 쓰는 문자의 민주주의를 머지 않은 미래에 실현할 것이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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