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현대 살리기'를 놓고 경제계 안팎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대우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대까지 무너질 경우 국가 경제에 엄청난 파장이 예상되므로 일정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게 찬성론자들의 주장.반면 반대론자들은 현대에 대한 지원은 원칙을 무너뜨린 명백한 특혜로 국내 기업전반의 구조조정을 지연시키는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찬성] 부도·법적화의 국가경제 치명상 초래
금융당국은 일시에, 집중적으로 회사채 만기가 도래하는 기업은 산업은행을 통해 회사채를 신속 인수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회사채 신속인수제도의 대상기업이 현대그룹 관련 계열사로 집중됨에 따라 시중에서 특혜대출시비와 기업구조조정지연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현대건설은 해외공사에 대한 이행보증 및 추가대출을 받았으며, 현대전자는 금년중 신속인수제도로 약 2조9,000억원의 지원을 받을 예정이다.
이에 따라 현대전자는 64메가D램 가격이 2달러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한 단기적으로 유동성 위기를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현재 일고있는 특혜대출시비를 살펴보자. 산업은행은 현대전자 회사채를 신용등급 BBB- 수익률에 가산금리로 0.4% 포인트를 더해 인수하고 다시 현대전자로 하여금 후순위채를 인수토록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현대전자 주주들이 이번 신속인수에 의해 크게 자본이득을 본 것은 아니다. 이는 신속인수 후 현대전자 주가가 크게 상승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정부의 조치로 현대전자의 구조조정이 지연될 것이란 지적도 있다. 물론 이번 신속인수 조치는 국민경제적 비용을 대가로 현대전자를 부도처리할 수 있는 채권자의 권리 행사를 유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전자가 기업으로서 가치가 축소돼 결국 부도가 발생하면 프리미엄의 적정가치는 0에 근접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현대전자가 영업이익을 지속적으로 내면 그 가치는 비용 이상이 될 것이다.
여기서 현대전자의 경영상태와 향후 D램 가격의 변동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전자는 이익의 변동성이 매우 크다.
향후 D램 가격의 전망도 어둡고 7조7,000억원의 차입금에 대한 이자와 계속적인 설비투자를 위해 매년 약 1조원의 추가자금이 필요하다.
하지만 작년처럼 대규모 비경상적 손실이 발생하지 않고 향후 D램 가격이 3∼4달러 이상을 유지하면서 비용을 절감하면 부채 구조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부도처리할 수 있는 채권자로서의 권리를 보유한 정부는 경영 효율성 제고에 의한 영업이익의 확대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다만 현대전자의 경상이익개선 속도가 더디다면 해당 채권을 기업구조조정전문회사 등에 매각하면서 출자전환 등을 통해 은행 등의 자산건전성 악화를 방지하고 구조조정을 촉진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이 높지 않고 워크아웃제도가 폐지된 상황에서 현대 관련 대규모 계열사를 부도나 법적화의로 처리하면 진성어음 부도 등으로 인해 실물 및 금융에 걸쳐 즉각적인 침체가 발생할 수 있다.
대우 처리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대까지 무너진다면 국가경제가 치명상을 입을 수 있으므로 기업구조조정을 촉진하는 제도를 계속 정비하면서 신용경색에도 유연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한상일 금융연구원 부연구원
[반대]정부처방 문제 확대재생산 편법 불과
현대건설, 현대전자 등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다. 은행들에게 기존 대출의 만기연장을 강요하더니 얼마 전에는 산업은행 중심의 회사채인수제도를 수용케 했다.
나아가 신규대출도 떠맡겼고, 신용정보회사들의 '협조'를 구해 현대 계열사에 대한 신용등급을 상향조정시켰다.
그동안 현대 대책에서 살릴 지 말 지, 살린다면 어떻게 살릴 지 갈팡질팡하더니 아예 구태의연한 개발독재 방식으로 회귀한 셈이다.
다만 원래 그런 패러다임이 몸에 밴 현 경제팀에겐 이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갈팡질팡도 덜해지고, 적어도 일관성만은 갖춤으로써 경제를 다소 안정시킨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그 효과가 얼마나 갈 것인가. 이런 식의 처방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로 파탄이 증명된 시스템이다.
현 정권은 현대와 공동운명체가 되기로 작심했는지 모르지만 부실을 더 키운 대우나 정권과 더불어 몰락한 한보의 전철을 밟지 말란 법이 있는가.
물론 비정상 상태인 금융시장에 모든 걸 내맡기기는 어렵다. 또 현대 계열사들은 기간사업체여서 위기시 파급효과가 만만찮고 민족적 과제인 대북사업의 주역이기도 하다.
게다가 대우사태만으로도 허덕대는 판에 현대마저 쓰러졌을 때 정부가 제대로 수습할 수 있을지 의문도 든다.
하지만 편법은 편법을 확대재생산하고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이월일 뿐이다. 이제라도 정공법으로 나아가야 한다.
첫째, 현대건설 등의 자산ㆍ부채 실태부터 정밀 실사해야 한다. 현대건설의 경우라면 공사미수금 중 얼마가 회수 불능인지, 분식회계는 얼마정도인지 밝히고 국내외 사업장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수박겉핥기 조사가 아니라 대우의 재판이 되지 않도록 철저히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회생가능 여부를 단호하게 판단해야 한다.
둘째, 만약 회생 가능하다면 부채의 출자전환도 고려해야 한다. 다만 이땐 총수와 그 가신들의 책임을 철저히 물어야 한다.
약속한 사재출연을 이행시킴은 물론 경영일선에서 퇴진시켜야 한다. 자문역 이상은 곤란하다. 기업을 잘 알고 틀어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총수 등을 그대로 둔다면 김우중씨는 왜 퇴진시켰는가.
경영의 근본적인 수술은 새 인물로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
셋째, 대북지원은 더 이상 현대에게만 짐지우지 말아야 한다. 현대가 피멍들어 결국 나중에 국민 돈으로 메우는 다단계 절차를 밟지 말고, 국민의 이해를 구해 정부와 시민단체가 본격적으로 대북지원에 나서야 한다.
또 현대건설이 보유했던 현대상선 주식을 현대엘리베이터에게 헐값 매각한 것은 원인무효화해서 현대건설의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
넷째, 정부가 현대처리에서와 같은 편법을 쓰지 않게끔 금융권을 조속히 정상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안되는 기업을 확실히 도태시켜야 하며, 필요하다면 추가공적자금 재조성도 각오해야 한다. 이런 것 미뤄둔 채 경제개혁을 완료하겠다고 하니 어이없지 않은가.
김기원 방송대 경제학과 교수
■'현대 살리기'실태
현대에 대한 지원이 시장을 살리기 위한 현실론이냐, 특혜냐에 대한 논란은 지난해 10월 현대건설의 1차 부도후 채권단이 현대건설의 모든 금융기관 부채를 연말까지 만기연장해주기로 결의하면서 비롯됐다.
당시 현대의 부채 총액은 5조4,000억원으로 그 이후 현대는 지속적 만기연장에 힘입어 자구계획을 순조롭게 이행함으로써 부채를 1월말 현재 4조5,000억원까지 줄일 수 있었다.
당시 채권단 관계자는 "시장 원리에 맞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도기 상황에서 현대를 무너뜨릴 경우 파장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지난해 12월말 정부가 자금시장 안정책으로 내놓은 '회사채 신속인수제'역시 혜택을 받은 기업이 6곳 가운데 4곳이 현대건설, 현대전자, 현대중공업, 고려산업개발 등 현대 계열 기업이어서 현대를 위한 제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회사채 신속인수제'는 만기가 돌아온 회사채를 그 발행기업으로 돌리지 않고 금융기업에서 재발행하도록 한 제도.
이때 회사채 인수조건이 증권업협회가 발표하는 해당 신용등급의 공모사채 금리에 고작 0.4% 포인트의 가산금리만 얹기로 했다는 점도 특혜 시비에 올랐다.
이 때문에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지명자 로버트 죌릭은 현대전자에 대한 회사채 신속인수 조치는 세계무역기구(WTO) 보조금 규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지난해 말에는 유동성 위기 이후 축소된 수출환어음(D/A) 한도를 8억4,000만달러에서 14억4,000만달러로 늘려주기로 정부와 채권단이 합의했다.
이 역시 현대전자가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기업특성상 늘려주지 않는 한 회사채 신속인수는 실익이 없다'고 요구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현대건설에 대한 지원도 계속되고 있다. 채권단은 현대건설 여신 만기연장 기한을 6월말까지 다시 늘려준데 이어 2월 들어 아파트 분양대금을 담보로 3,600억원 가량을 신규대출해주기로 의견을 모았다.
특히 정부는 같은 시기에 현대건설의 해외공사 수주를 원활히 하기 위해 시중은행을 통해 해외공사 수주시 4억달러(약 5,000억원)를 지급보증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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