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국제문제 대기자 마틴 울라코트는 오래 전 '쿠데타와 지진'(Coup and Earthquakes) 이란 책을 썼다.국제언론의 제3 세계 보도가 정변(政變)이나 천재지변 때만 반짝하는 탓에, 흔히 천박하고 부정적으로 흐른다는 내용이다.
이 책은 제3 세계의 진정한 현실과 고민을 왜곡하는 국제보도 관행을 시비하는 '신국제정보질서' 논쟁에도 자주 인용됐다.
1986년 마르코스 독재를 무너뜨린 필리핀 민중혁명은 이런 제3 세계 보도관행도 함께 허문 듯 했다.
마르코스 정권 말기부터 경제 피폐상과 공산화 위기 등을 집중 보도한 국제언론은 민중의 힘, 피플 파워를 화려한 수사로 찬탄했다. 뒷날 필리핀 민중혁명이 동구권 시민혁명을 촉발했다는 과장된 평가도 주저하지 않았다.
울라코트가 저서를 다시 쓴다면, 제목부터 '쿠데타'대신 '민중혁명'으로 바꿀 법 했다.
지난 달 부패ㆍ무능한 영화배우 출신 대통령 에스트라다를 밀어낸 '피플 파워 속편'은 언뜻 15년 전 첫 작품에 버금가는 축복이다.
우리 언론 보도만 보면 그렇다. 그러나 속편은 대개 첫 작품에 못 미친다. 허울만 속편일 뿐, 내용은 엉뚱한 경우도 있다. '피플 파워 속편'이 바로 이런 범주에 든다.
워싱턴 포스트 등 국제언론은 부패혐의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을 지닌 대통령을 기득권 세력과 음모적 군부가 작당해 축출한 위헌성을 지적했다.
탄핵 반대여론이 우세한 상황에서 군중시위를 동원한 사실상의 군부 쿠데타란 규정도 있다. 오랜 독재 경험 탓인지, 민중혁명론에 쉽게 경도하는 우리 사회도 되짚어 봐야 할 평가다.
에스트라다는 갖가지 스캔들로 도덕성을 상실한데다 국정에도 소홀, 외국 투자자까지 등 돌리는 바람에 재계와 중상류 계층의 불만이 컸다.
여기에 불법복권업자 등에게서 수천만 달러 뇌물을 받은 의혹이 폭로돼 탄핵위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상원이 표결로 탄핵절차를 중단한 것은 형식상 하자가 없고, 에스트라다가 헌정질서를 무시한 것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을 뒤엎은 결정적 힘은 피플 파워가 아니라 정ㆍ재계 엘리트 세력과 군부였다.
영국 BBC 방송은 재계가 주도한 거리시위에 섞인 서민대중은 음료수 행상뿐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구질서를 대변하는 아키노와 라모스 두 전직 대통령과 하이메 싱 추기경 등이 노골적으로 군부의 모반을 촉구하고, 군이 호응해 통수권자의 사임을 요구하고 나서 대세가 갈렸다.
대법원이 여성 부통령 아로요의 권력승계를 결정한 것은 헌법과 무관하게 대세를 추인한 것에 불과했다.
여기서 이번 사태가 '민중 없는 정변'이란 규정이 나온다. 영화 속 서민 대중의 우상 에스트라다가 기득권세력 후보를 제치고 집권한 것에 불만인 지배 엘리트들이 오랜 모색 끝에 탄핵정국과 민중혁명을 연출했다는 분석이다.
이는 새 대통령 아로요와 아키노, 라모스 등이 모두 필리핀의 지배족벌과 기득권세력 출신인데 비해, 에스트라다는 '평민'출신 인 점이 뒷받침한다. 그의 부패혐의도 필리핀 정치에 뿌리깊은 부패상의 단면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정당성이 공인된 15년 전 '피플 파워 I'도 기실 온전한 민중혁명은 아니었다. 민중지지를 잃고 통제불능이 된 마르코스 정권을 우호세력으로 대체하려는 미국과, 미국 육사출신 라모스가 대표한 정통군부가 실제 흐름을 이끌었다.
민중혁명의 상징 아키노는 마르코스가 집권 초 개혁을 꾀하다 좌절한 구질서의 이익대표였다. 정권실세는 라모스였고, 그는 6년 뒤 대통령에 올랐다.
이들의 집권 12년 동안 필리핀 국정과 민중의 삶에 이렇다 할 개혁은 없었다. 변화가 있다면, 마르코스 문민독재에 눌렸던 군부가 정치세력화 한 것이다.
마닐라의 허울뿐인 '민중혁명'드라마는 스페인 미국 일본 등의 거듭된 외세지배 속에 정체성을 상실한 채 극단적으로 계층이 갈린 후진사회의 비극이다.
아로요 정부가 더욱 강력해진 군부에 휘둘린다는 소식은 비극의 연속상영을 예고한다. 필리핀은 '바나나 공화국'으로 한층 깊게 추락하고 있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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