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호철씨가 10년 만에 다섯번째 창작집 '이산타령 친족타령'(창작과비평사 발행)을 묶어냈다.이씨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6ㆍ25 발발시 고교생으로 인민군으로 동원되었다가 국군 포로가 되어 월남한지 50년, 이후 '탈향'(1955)으로 문단에 나온지는 46년이 된다.
그의 글쓰기는 그대로 한국전쟁 이후 50년간의 한국 현대사와 맞물려 있다. 그는 올해로 고희를 맞았다.
이씨는 이즈음 "나의 소설 쓰기는 탈향(脫鄕)에서 귀향(歸鄕)으로 이어지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말해왔다. 실제 이씨는 지난해 8월 이산가족들의 평양 방문에 동행해 50년 만에 누이동생을 만났다.
'이산타령 친족타령'에 실린 그의 소설들은 이 같은 그의 생의 역정을 반영하듯 전쟁과 분단,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온 이 땅 사람들의 삶을 누구보다 선열(鮮烈)하게 그려냈다.
이씨의 표현대로 '오만잡설' 다 제하고 전장의 냉혹한 현실, 그 속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생짜배기 모습이다.
표제작은 이산으로 인한 우리 가족ㆍ친족관계의 변화를 절묘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1945년 8월 해방으로 중국땅에서 귀향하게 된 부부가 있다. 귀국선의 북새통 속에서 세 자매를 다 데려오지 못하고 여섯살 난 큰아들을 이웃에 살아 친하게 지내던 젊은 과수댁에게 맡긴다.
30분 뒤에 연이어 출발하는 배 편으로 돌아올 테니 부산항에서 함께 만나자는 말과 함께. 그러나 아들과는 그것이 영 이별이 되어버린다. 과수댁은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온갖 수소문에도 아들을 찾지 못하고 과수댁을 원망하던 부부는 캐나다로 이민간다. 1970년대 말 해외교포 모국방문단에 끼어 북한을 찾은 부부는 과수댁과 그가 잘 키워 어엿하게 마흔 살의 나이로 성장한 아들을 만난다.
이들의 만남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장면의 묘사에 이산가족 문제, 나아가 남북문제를 보는 이씨만의 독특한 시각이 들어있다.
"그 참 희한합디다. 내자 쪽에서는 되레 그 과수댁의 입을 한 손으로 막으려고 들며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 저으면서 '그깐 일은 뒤에 천천히 들어도 늦지 않아요, 늦지 않아'라며 다짜고짜 와락 얼싸안기부터 하더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두 할망구가 얼싸안고 한바탕 울기부터 하는데, 가만히 보아하니, 저간의 그 아들 찾던 일, 삼십년 간 죽을 둥 살 둥 오직 그 일 한가지로만 노심초사 갖은 고생을 해 왔던 그런 일은 두 사람 사이에 금방 눈 녹듯이 사라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가족들은 그들이 왜 헤어지고 무엇 때문에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는가 하는 그 원천을 따지기보다는 그저 얼싸안고 우는 것으로 그 사이의 일은 눈 녹듯이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단편들 '비법 합법 불법'과 '사람들 속내 천야만야'는 6ㆍ25 전쟁의 와중에서 일어난 삽화들을 통해 '망나니 같은' 한반도에서의 사람살이를 그린 작품이다.
이씨는 '통일은 이렇게 저렇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식의 뻔한 언설보다는 전쟁 기간에 벌어졌던 상황의 세부 묘사를 통해 역사의 냉혹함과 인생사의 아이러니를 처절할 정도로 천연덕스럽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씨는 오래 전부터 이른바 '한살림 통일론'이라는 것을 주장해 왔다. "형편만큼 한솥밥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통일의 길은 자연스럽게 온다"는 것이다.
같은 산천에 산다는 따뜻한 인식이 어떤 사회과학적 인식이나, 정책 담당자들의 눈치보기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산타령 친족타령'은 그 길을 보여주는 우리 인간사의 보고서로 읽힌다.
이씨는 요즘 고희 기념 선집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연보를 새로 쓰며 또 다른 감회에 젖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는 누이동생이 살고 있는 원산 송도원 해수욕장으로 명승지 기행을 떠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라고 그는 말했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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