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년간 우리나라 의료보장제도를 힘겹게 떠받쳐왔던 사회보장(사회보험)원리가 붕괴될 위험에 빠졌다.사회보장 원리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돕는 인도주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전국민의료보험의 달성, 관리 및 재정의 통합을 위한 건강보험의 탄생, 의약분업 실시 등 그간의 괄목할만한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숭고한 상부상조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주 수요일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나온 보건복지부 장관의 발언 중에는 사회보장의 기본원리에 위배되는 중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소액진료비 본인부담제와 의료저축제도가 그것이다. 소액진료비 본인부담제란 일정액 이하 소액진료비는 전액 본인이 부담하는 것인데 이것은 현행 본인부담제의 편법적 확대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는 본인 부담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나라인데 더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의료저축제란 현재 싱가포르가 실시하고 있는 제도로서 일종의 의료비 강제저축제도이며, 성격상 사회보장제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이 낸 보험료 중에서 자기가 쓰고 남은 보험료를 더 어려운 사람이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사적으로 사용하게 하거나 심지어 대를 이어 상속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제도의 강점은 의료이용률을 억제시켜 의료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지만, 진료시기를 놓쳐 큰 병을 유발시키거나 저소득층의 의료비 부담을 늘리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더욱 더 큰 문제는 싱가포르에서조차 이 제도실시를 통해 국민총의료비가 절감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이 같은 발상을 내놓은 보건복지부의 고충을 이해못할 바도 아니다.
진료비 지급이 불가능할 정도로 의료보험재정이 완전고갈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누적적자가 1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보건복지부로서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올 하반기에 또 한차례의 보험료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의료보험재정의 부도를 막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릴 여유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더라도 사회보험원리까지 포기해서는 안된다. 인생이 고달프다고 자살사이트를 허용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정부는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할 의무를 지닌다. 상부상조정신을 고수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는 정부를 통해 국민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는 법이다.
지금까지 4반세기를 지켜온 사회보장 원리를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버리려고 하는 정부를 보고 국민은 어떤 생각을 갖겠는가. 분명히 말하건대 이번에 발표된 보건복지부의 계획은 장고 끝에 나온 악수이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보다 근본적이고 큰 틀에서 의료보험재정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재정지출이 늘어난 데에는 노령인구 증가, 성인병 확산, 생활수준 향상 등의 자연증가 요인도 있고, 자영자 소득파악률 저조, 제도관리의 방만성, 정부부담 미약 등 누적된 정부의 실책도 있다.
더욱이 진료비 상승을 억제하기 위한 정부 노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만병의 원인인 흡연을 죄악시하기는커녕 담배 판매를 통한 막대한 세수를 얻었고, 고령화 사회를 예언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노인을 위한 장기요양에 대한 투자에는 관심이 없다.
예방의학이나 제1차 의료제도의 확충은 우리나라 국가정책 목록에 빠져있는 실정이다. 보건복지부가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예산당국은 굳어있는 돌부처라고 알려져 있다.
이번 청와대 보고는 의료정책이 범정부 차원에서 고려되지 않고 단순히 보건복지부 차원에서만 논의될 때 어떤 변칙과 파행이 발생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김상균ㆍ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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