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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이수현씨와 희생의 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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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이수현씨와 희생의 생물학

입력
2001.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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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청년 이수현이 일본을 울렸다. 도쿄 전철역에서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외국 청년의 엄청난 희생에 온 일본이 들먹이고 있다.그의 영결식에는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물론 많은 일본국민들이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한다.

비슷한 시기에 부산에서는 조희권씨라는 40대 남자가 여섯 살 짜리 딸을 안고 불을 피해 아파트 10층에서 뛰어내리다 딸의 목숨은 구하고 자신은 끝내 숨진 사고가 발생했다.

신문에 두 기사가 나란히 실렸는데 할애한 지면의 크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부산 사고에 대한 기사는 이수현씨에 대한 기사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다른 생명을 구하려다 자신의 생명을 잃기는 마찬가지인데 이 두 사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40대의 희생이 20대의 희생보다 못하단 말인가.

국내에서 보인 희생은 외국에서 보인 희생에 비해 덜 값지단 말인가. 일본 언론이 우리 언론보다 더 따뜻해서 그런가.

이런 사회적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 두 사건에는 뚜렷한 생물학적 차이가 있다. 자기희생 또는 이타주의의 진화를 설명하는 생물학적 이론들에 이 두 사건은 마치 짜맞춘 듯 완벽한 실례를 제공한다.

꿀벌도 친족위해 희생해

자연선택설에 입각하여 진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한 다윈에게 이타주의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자연현상이었다.

왜 똑같은 암컷으로 태어나 누구는 여왕벌이 되어 후세에 유전자를 남기는 일을 하는데 또 누구는 일벌이 되어 죽도록 일만 하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가.

우리들 대부분은 벌에 쏘였을 때 황급히 쏘인 부위를 문지르기 때문에 쉽사리 관찰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일벌은 사실 독침과 함께 독을 만드는 내장기관을 모두 적의 몸에 꽂고 날아간다.

그래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독침기관이 계속해서 적의 몸 속에 독을 주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침을 꽂고 물러선 일벌은 두어 시간 후면 이내 목숨을 잃고 만다.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일벌의 희생은 조희권씨나 이수현씨의 희생에 뒤질 바 없이 숭고하다.

하지만 일벌이 구하려는 '남'은 자기 어머니인 여왕벌과 형제자매들인 일벌과 수펄들이다. 유전자를 공유하는 친족이라는 말이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일벌의 희생은 조희권씨의 희생과 흡사하다. 이른바 혈연선택(kin selection) 이론에 따르면 유전적으로 가까운 친족을 위한 희생은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희생들이다.

타향서는 고향만큼 회생 어려워

그렇다면 유전적으로 상관이 없는 개체들을 위하여 베푸는 희생은 과연 어떻게 진화한 것일까. 동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배고픈 동료에게 피를 나눠주는 흡혈박쥐의 경우 물론 친족에게 주로 베풀지만 때론 유전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는 남에게도 베푼다.

물에 빠진 주인을 구하기 위해 강물로 뛰어드는 개의 행동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유전적으로 관련이 없는 개체들간에 벌어지는 이타주의의 진화에 대한 이론을 최초로 제시한 사람은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즈(Robert Trivers)이다.

이른바 상호호혜(reciprocal altruism) 이론이라 부르는 논리를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록 유전적으로는 관련이 없더라도 자주 만나는 개체들간에 자기가 남에게 베푸는 도움이 훗날 되돌아올 확률이 높을 경우 충분히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그렇기 때문에 타향에서는 고향에서만큼 쉽사리 베풀지 않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만큼 내 도움이 되돌아올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이수현씨의 희생이 이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는 친족을 위한 희생보다 그만큼 더 어렵고 또 타국에서 일어났다는 점에 있다.

그가 만일 목숨을 잃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구출된 일본인이 훗날 그를 구하게 될 확률은 매우 낮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일본인들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희권씨의 희생이 덜 값지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들이 느끼는 충격이 다를 뿐이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지난주 소방대원 사례, 의도와 다르게 전달되 사과드립니다

지난 주에 제가 쓴 '위기관리 없는...'을 읽고 몇몇 소방대원들께서 이메일로 제게 섭섭함을 알려오셨습니다. 24시간 2교대로 일하며 생명을 구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불길에 뛰어드는 우리 나라 소방대원더러 어떻게 빈둥거린다 할 수 있느냐고 꾸짖으셨습니다.

일일이 사과의 답신을 드렸습니다만 제게 글을 보내시지 않은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하여 공개적으로 사과의 글을 올립니다.

외국에 비해 엄청나게 적은 인원으로 빈번한 화재는 물론 현관 열쇠를 잃었다는 전화까지 받아야하는 119 소방공무원들의 노고를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럴 틈도 거의 없겠지만 출동을 기다리며 대기하는 시간마저도 놀고먹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빈둥거리고'라는 말에 따옴표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 표현의 잔재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셨다면 이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사과를 올립니다.

훌륭한 예로 든다는 것이 정반대로 전달되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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