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환타지를 창조하기 위해 '환단고기'와 '삼국유사'를 뒤적이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덴마크를 배경으로 한 '햄릿'이 위대한 영국문학이듯이, 환타지라는 만국 공통의 코드를 공유하면서 문학의 품격만 지닐 수 있다면 작품의 배경과 무대가 굳이 한국의 역사나 전설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드래곤 라자' '폴라리스 랩소디'의 작가 이영도씨가 지난해말 쓴 이런 요지의 글 한 편을 계기로 지금 컴퓨터통신 공간에서는 '한국적 환타지' 논쟁이 두달째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영도씨를 비롯해 '퇴마록' '왜란 종결자'의 작가 이우혁씨, '동해' '데프콘'의 작가 김경진씨등 국내 대중문학의 3대 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이 모두 하이텔 창작연재란에서 벌어지는 이 논쟁에 참여했다.
김씨는 새로운 한국적 환타지의 구축을 주장하는 편이고, 이우혁씨는 양자의 입장을 절충하면서도 '환타지'라는 이름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해 나가겠다는 쪽이다.
이들의 논쟁은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이 논쟁은 환타지문학의 범위와 성격, 나아가 순수문학과의 영향관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환타지라 하면 그간 J. R. 톨킨의 '반지대왕'에서 비롯된 서구중세와 신분ㆍ사회체계를 기본틀로 하는 이른바 '하이 환타지'가 정통으로 인정돼왔지만, 그것이 국내에서도 대중적 문학장르로 확실히 자리잡으면서 토착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환타지 애호가들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1980년대초 중국 작가 김용의 '영웅문'이 새로운 무협소설의 바람을 일으킨 이후 이우혁씨의 일련의 소설을 전환점으로 일본산 대중 호러(공포물)의 소개, 그리고 이영도씨와 '귀환병 이야기'의 이수영씨 등 젊은 작가들의 등장, 결정적으로 '해리 포터' 열풍으로 한국에서도 환타지가 확실히 정착된 것으로 계보를 정리하기도 한다.
순수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적 환타지 논쟁은 한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문학평론가 장은수씨는 "환타지의 물결은 이른바 본격문학에도 중요한 출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정된 이야기의 틀에 갇혀 침체한 문학계에 환타지가 가진 상상력은 돌파구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 윤성근씨는 이를 '환타지의 역습'이라며 문학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으로도 파악한다.
그는 "왜소해진 순수문학은 환타지의 도전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자들의 감식안은 정확하다.
독자들은 소설에서 참된 것과 즐거움을 동시에 요구한다. 그들이 순문학보다 환타지를 선호하는 것은 환타지가 그런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보르헤스, 마르케스 등 세계적 작가를 가진 남미문학의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은 그 자체가 환타지적 성격이며 남미문학 전체가 환타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이러한 움직임은 우리 순수문학계에도 반영되고 있다. 김영하 백민석 송경아 배수아씨등 90년대 후반 문단에서 신세대 작가라고 세대론적으로만 분류된 신진 작가들도 사실상 이러한 환타지의 세례를 받고 그것을 체득한 이들이라 할 수 있다.
계간 '문학과 사회' 2000년 가을호는 '이 작가' 란에 이례적으로 '듀나(DJUNA)'라는 환타지 작가를 조명했다. 듀나는 SF소설집 '면세구역'으로 화제가 됐던 컴퓨터통신 공간의 작가이다.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고, 단일 작가가 아니라 자매 혹은 3인 이상이 함께 작업하는 창작집단으로도 파악된다.
평론가 성민엽씨는 듀나의 소설이 하위 장르의 한계를 탈피한 훌륭한 문학이라고 평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성찰을 창조적으로 수행한다'는 문학의 기준에서 볼 때 한국의 환타지는 이제 새로운 가치평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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