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의 눈부신 발달과 함께 올바른 생명윤리의 확립이 시급하다. 바야흐로 인간 유전체(genome)가 그 전모를 드러내기 직전이고 양에서 출발한 체세포 복제가 급기야 원숭이에 이르렀다.인간 유전체의 염기서열을 밝힌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과학적 개가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유전체에서 어느 유전자가 어디에 앉아 있느냐는 배치도를 그린 것에 불과하다.
왜 그 유전자가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무슨 일에 관여하는지 등을 밝히려면 앞으로도 몇 십 또는 몇 백 년이 더 걸릴 것이다.
웃지못할 배아연구 기준
요즘 인간 배아 연구를 허용할 것인가, 허용한다면 어디까지 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그 논란의 한 가운데 '수종 후 14일 기준'이라는 웃지 못할 쟁점이 있다. 수정이 된 지 14일을 전후하여 인간 배아는 이른바 원시선(primitive streak)이라는 형태를 갖추는데, 이곳으로부터 모든 기관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이전의 '세포덩어리'와는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과 수정란부터 생명을 지닌 인간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14일 기준에 과학적인 객관성을 부여하기는 사실 어렵다. 14일이란 시각도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고 기관이 만들어지는 시각이 가져야 할 중요성이 그리 특별 날 이유도 따로 없다.
그러나 수정란을 생명체로 간주하는 견해는 더욱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수정란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수정란도 성체와 똑같이 보호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성을 수반한다.
하지만 이 점에는 과학적으로 피할 수 없는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경우 임신의 거의 80%가 이런 저런 이유로 산모의 몸 속에서 자연유산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여성들의 절대 다수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생명체를 죽이는 살인자가 되는 셈이다.
수정란이나 초기 배아를 중시하자는 의견들은 다 생명 경시 풍조를 지적하는데 비록 모르고 저지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살인이 되는 걸 어찌하랴.더구나 자기 자식의 생명인데.
생명은 DNA의 표현일뿐
새들을 비롯한 지구상의 거의 모든 동물들은 수정란을 몸 속에 품지 않는다. 물고기나 개구리들은 아예 수정도 몸 밖에서 하지만 체내수정을 하는 새들도 수정이 되기 무섭게 알을 몸 밖으로 내놓는다.
둥지에 놓여 있는 알을 과연 '생명체'로 봐야 할 것인가. 오리알을 날 걸로 들이마시면 한 생명체를 통째로 그것도 산 채로 삼키는 셈이 된다.
생명의 시작을 얘기하려면 어쩔 수 없이 유전자로 환원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생명체란 유전자가 더 많은 유전자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매개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생명체란 유전자의 정보에 따라 만들어져 이 세상에 태어나 일정한 시간을 보내곤 허무하게 사라지는 존재이지만 유전자는 세대를 거듭하며 살아 남는다.
생명의 역사는 한 마디로 DNA라는 기막히게 성공적인 화학물질의 일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은 이처럼 한 생명체의 탄생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온 DNA의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생명체의 시작은 과연 어디인가. 생명체, 즉 스스로 숨쉬고 번식하는 독립적인 실체의 시작 말이다.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에는 세포의 수가 한 100개정도 될 때까지는 하나의 덩어리로 되어 있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둘로 갈린 후 완벽하게 정상적인 두 개체로 성장한다.
하나의 수정란이 100개의 세포들로 분화하기 이전의 그들을 과연 두 생명체로 봐야 할지 아니면 아직은 하나의 생명체로 봐야 할지 참 애매한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배아는 완전한 생명체로 보기 어렵다.
배아는 유전자가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중간 과정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유전자가 생명현상을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주고 그 몸이 '의식'을 얻어야 비로소 하나의 생명체가 탄생한다고 봐야 한다.
인간은 특별히 완전하지 않은 신경계를 가지고 태어나는 동물이다. 신경계가 자의식을 확립하여 하나의 완벽한 '영혼'으로 거듭나는 시각은 어머니의 몸을 빠져 나와서도 한참이 지난 후이다.
원천봉쇄보다 공동연구를
이처럼 생명체의 시작을 논한다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생명은 연속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 문제일 뿐 인간 배아 전반에 관한 실험이 어떤 형태로든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인위적으로 규제한다고 영원히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구더기가 무섭다고 판도라의 상자를 닫아둘 수는 없다.
인간 유전자의 호기심이 절대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열되 조심스럽게 열 수 있도록 생명과학자들을 도울 일이다.
우리나라만 규제한다고 다른 나라도 모두 자제할 리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생명과학의 거의 모든 정보가 미국의 손아귀로 흘러 들고있다.
이대로 가면 전세계가 미국의 속국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원천적으로 봉쇄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연구에 참여해야 한다.
생명과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합당한 윤리규범을 만들도록 시간을 줘야 한다. 아직 족쇄를 채울 때가 아니다. 인문사회학자들과 생명과학자들의 학제적 공동연구가 절실하다.
서울대 생명공학부 교수 jccho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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