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사상 두 번째 '피플 혁명'이 성공했다. 독재자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린 1986년 사건과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탄핵 심판을 받은 '부패한' 민선 대통령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다.필리핀 국민은 국민으로부터 받은 권력으로 부정부패에만 탐닉했던 액션배우 출신의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용서하지 않았다.
▲ 불법상납의 몸통은 대통령
에스트라다의 몰락은 지난해 10월 자신의 30년 지기(知己)인 루이스 싱손 일로코스수르주 주지사가 불법 도박업자로부터 4억 페소(약 100억원)의 뇌물을 받아 대통령 등에게 줬다고 폭로하면서 촉발됐다.
그렇지 않아도 에스트라다의 독선적 정치스타일과 정실인사에 불만이 많았던 야당은 물론이고, 첫 번째 민중혁명을 주도했던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도 당시 피플파워의 상징인 노란색 옷을 입고 나와 총궐기를 촉구했다.
결국 에스트라다는 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된 뒤 상원에서 재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이 주식 내부거래로 차익을 챙긴 사실이 드러나는 등 에스트라다의 부패상이 백일하에 공개됐다.
에스트라다에게 적용된 혐의는 뇌물수수, 부패, 독직, 국민기만, 헌법위반 등 10가지가 넘는다.
▲ 15년 전 피플파워 재연
여론이 비등한데도 에스트라다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처럼 '해피엔드'를 기다리는 듯 수뢰설을 부인하며 여론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그는 17일 21명으로 구성된 상원 재판부의 탄핵 재판을 무기 연기시켜 최악의 위기를 넘기는 듯했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다.
4만 명의 시위대가 18일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인데 이어 19일에는 수십만 명이 과거 마르코스를 몰아낸 EDSA 성당 앞마당을 메웠다.
1998년 그에게 압도적인 표를 던졌던 빈민층도 등을 돌렸고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각료들도 떠났다. 육.해.공군 참모총장도 잇달아 반(反)에스트라다 진영에 가담, 시위에 가담했다.
▲ 불투명한 후계구도
에스트라다는 5월에 조기 대선을 실시하고 자신은 출마하지 않겠다며 '시간 벌기'에 나섰다. 하지만 분노한 시민들과 야당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를 벗어났으며, 에스트라다의 사임은 초읽기에 들어간 분위기이다.
그러나 향후 후계 판도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대통령 유고시에는 필리핀 9대 대통령인 고(故)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딸로 야당 리카스-NUCD 출신인 글로리아 아로요(54.여) 부통령이 자리를 승계하지만, 아로요 또한 에스트라다의 도박 연루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주장이 강한 편이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조지타운대에서 동문 수학한 아로요는 그러나 에스트라다 퇴진의 사령탑 역할을 충실히 수행, 아키노를 이을 여성지도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피플파워' 주도 아로요 부통령
조셉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을 사실상 사임에 이르게 한 시민혁명을 촉발시킨 글로리아 아로요(54ㆍ여) 부통령은 지난해 겸직해오던 사회복지장관직에서 사임한 뒤 반(反) 에스트라다 전선을 이끌어왔다.
대통령 유고시 자리를 이어받게 되는 그는 필리핀 9대 대통령 고(故)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딸로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대학 교수를 거쳐 지난 1980년대 후반 무역산업부 차관보로 공직에 발을 들여놨다.
1992년 상원의원 당선에 이어 98년에는 일약 부통령까지 올랐다. 그는 국민에게 좀 더 가까운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자신의 매력적인 모습을 선거 포스터에 싣는가 하면 TV 토크쇼와 오락물은 물론 코미디 프로그램에도 종종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
또 빈발하는 자연재해를 담당하는 부서의 장관으로서 국민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는 점도 대중적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인으로서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언변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왔으며 에스트라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재판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불법 도박업자와 연루설로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최기수기자
mounta@hk.co.kr
■조셉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의 몰락은 1986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장기집권 후 피플파워에 의해 물러났던 상황과 유사하다.
1955년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만 해도 그는 '민주개혁'의 열망에 가득찬 필리핀의 희망이었다. 당시 필리핀은 독립 19년이 지났지만 19세기 스페인 식민치하에서 형성된 전통적 과두정치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마르코스는 사회개혁과 민주국가 건설을 표방, 국민의 열렬한 성원을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치안상태를 개선했던 마르코스에 대한 국민의 인기는 1969년 재선을 기점으로 점차 사그라 들었다.
좌익세력과 족벌특권세력의 양극으로부터 도전을 받게된 마르코스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지 못했다. 공산혁명을 꿈꾸는 대학생들은 불법화한 공산당을 재조직했고 족벌세력은 반(反) 마르코스 움직임을 배후에서 조장,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1972년 마르코스는 공산세력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무수한 인권탄압사례가 나타났고 경제도 최악으로 빠져들었다.
그만큼 정권유지를 위한 정치자금도 불어났다. 게다가 외채는 260억 달러에 이르렀고 실업률은 30%를 넘었다.
개인적으로 미국에 빼돌린 재산도 3억 5,000만 달러에 이르는 등 도덕성을 상실했다. 또 부인 이멜다의 사치 호화생활도 국민의 비판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코라손 아키노 전의원의 암살을 방치하고 그 배후 조종자인 베르 군 참모총장에게 무죄판결을 내리게 하면서 마지막 기대를 져버렸다.
결국 모든 국정분야에서 실책을 거듭한 마르코스는 자진 하야 기회마저 놓친 채 해외로 도피할 수 밖에 없었다. 1989년 5월 망명지인 미국의 하와이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에스트라다 '인생 유전'
19일 사실상 사임한 조셉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은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의 예언대로 결국 '부정부패'의 늪 속에 빠져 스스로 몰락의 길을 재촉했다.
에스트라다는 배우출신으로 1998년 5월 대선에서 예상밖으로 라모스 전 대통령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 당선됐을 때 주변에서는 그의 주벽과 도박, 문란한 사생활 등 과거의 '화려한 전력'에 비추어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지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패배한 라모스는 그의 당선에 대해 "필리핀의 재앙"이라고 혹평했다.
1937년 마닐라의 슬럼가 톤도에서 엔지니어 집안의 10남매 중 여덟 째로 태어난 에스트라다는 영화배우로 활동하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신념으로 1969년 산 후안시 시장에 당선,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당시 필리핀에서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 재산세를 납부토록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겨 '국내 10대 우수 젊은이'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서민적 풍모로 무식하다는 비판을 듣지 않기 위해 컴퓨터를 배우는 등 노력하는 정치인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1987년 상원 선거에서는 전국 최고 득표율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뒤틀어지기 시작했다. 1999년 2월 미스 마닐라 출신과의 혼외정사 폭로를 기점으로 잇단 각종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대통령으로서의 권위가 추락했다.
결국 지난해 10월에는 친구인 루이스 싱손 주지사가 불법 복권 사업자로부터 830만 달러의 뇌물을 받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폭로하면서 그는 결정적인 위기에 몰렸다.
이어 주가조작 부동산투기 등 각종 부정부패 혐의로 그는 결국 의회의 탄핵을 받게 됐고 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됐다.
에스트라다는 16일 탄핵을 피하기 위해 최종 결정권이 있는 상원으로 하여금 하원 탄핵 검사들이 제기한 비자금 계좌 추적 요청을 부결시키는 악수를 둠으로써 임기를 반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게 됐다.
권혁범기자
hb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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