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 몹시 나빠졌는데요."내 맥을 짚던 한의사의 첫마디다. 별 생각없이 친구따라 간 중의원에서 날벼락을 맞았다. 놀란 내가 무슨 좋은 약이 없겠냐니까 이렇게 말한다.
"이건 긴장하고 살아서 생긴 병이에요. 뭐든 빨리 빨리, 너무 잘 하려고 하는 생각, 그래서 '간 졸이는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약입니다."
뜨끔했다. 바로 전날에도 일기장에 중국어 실력이 팍팍 늘지 않는다며 한바탕 투정을 늘어놓았던 터다. 그날 저녁 오랜만에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봐도 어딘지 모르게 힘이 잔뜩 들어간 얼굴이다.
외국에서 보면, 좀더 객관적으로 보여서일까, 한국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공통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웃음기 없는 얼굴, 잔뜩 긴장한 얼굴. 조금이라도 불이익이나 불만스러운 일이 생기면 당장 주먹이 나갈 것 같은 공격적인 얼굴. 사업이나 공부하는 사람들은 물론, 느긋하게 여행하는 사람들 얼굴에서조차 무시무시한 전운이 감돈다. 지금 내 얼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중국어 한마디가 튀어나온다.
팡송팡송(放松放松)! 긴장을 풀고 느긋하게!
매일매일 귀가 닳도록 듣는 말이다. 나는 지금 베이징(北京)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다. 그리고 체력단련으로 수영을 하는데 자세교정 개인 코치까지 두면서 열심을 부리고 있다.
신기한 것은 중국어와 수영이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과목 강사가 수업시간이면 약속이나 한 듯 이 말을 연발하는 점이다.
중국어 수업시간에는 나보다 훨씬 어린 학생들 앞에서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저절로 긴장이 된다.
그러나 긴장할수록 된소리가 나오고 성조(각 단어의 높낮이)도 틀리기 십상이다. 그러면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팡송팡송!
재미있는 건 수업시간에는 도무지 안되던 발음이나 표현이 노는 시간에 웃고 떠들 때는 너무나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사실이다. 복도에서 선생님이 내 목소리를 듣고 고급반 교실로 착각할 만큼.
수영시간에도 마찬가지다. 새로 자세교정을 받으면 이번에는 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어깨와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그러면 오히려 자세가 더 흐트러지고 힘만 든다.
그러다 실수로라도 몸에 긴장을 풀면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아주 자연스럽게 몸이 가벼워지고 리듬감이 생기면서 비로소 한 마리 물개로 변한다. 이럴 때마다 수영 코치가 하는 말.
"팡송팡송!"
"알겠지요? 수영을 잘 하려면 물과 싸우지 말고 지금처럼 물과 놀아야 한다니까요." 뭐라고? 잘하려면 싸우지 말고, 놀아야 한다고? 이게 무슨 엉뚱한 말인가.
우리는 여태껏 무엇을 잘 하려면 싸워야 한다고,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배웠다. 늘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아야 뭔가 이룰 수 있다고. 그래서 나 역시 일이건 여행이건 공부건 전쟁터의 전사처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요즘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잔뜩 긴장한 채 싸웠던 실체는 일 자체가 아니라 남이었다. 남보다 늦었다는 생각, 남보다 잘 해야 한다는 생각, 그러나 '기초공사'가 잘 되지 않았다는 불안감. 그 긴장된 표정과 태도는 다름 아닌 부실한 자신을 감추기 위한 갑옷일 따름이었다.
이제는 알겠다. 왜 세상에는 이를 악물고 사는 사람보다 느긋하게 사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이루고 누리면서 사는지.
이들은 자기가 하는 일과 무작정 싸우는 대신, 잘 사귀면서 재미있게 지낼 줄 알기 때문이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아니 이제부터 이렇게 살아야겠다.
팡송팡송! 이 한마디가 비결이란다.
한비야 여행가ㆍ난민구호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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